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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D컬렉티브 Aug 22. 2021

느리지만, 느리지 않은,
그 길을 걷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


가까이 봐도 좋고, 멀리 봐도 좋은 그 장소.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이를 우리는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기에 사진으로 남긴다. 그래서인지 사진 속에는 우리가 담고 싶은 찰나의 순간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진 속에서도 유독 시선이 가는 이미지가 있다. 푸르고 파란 배경을 지닌 바로 자연이다. 이 장소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사계절마다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장식적인 꾸밈으로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지도, 자연 특유의 향과 색은 짙고 푸르다. 그래서 자연은 어떤 사진보다도 꾸밈없이 날 것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 아우라를 드러낸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사진이 복제가능한 이유로 작품 원본의 아우라를 파괴했다고 설명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의 찰나를 포착한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이 생명력과 존재감은 무엇일까?



 늘푸른 그 장소에서, 사진 한 장을 찍다.



카메라를 통해서 본 자연의 풍경은 개인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와 함께 원하는 장면만을 포착하여 사진첩에 저장한다. 그리고 자연속의 그 장소는 영원히 그 시간을 멈추게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말처럼, 봄과 여름사이의 계절의 변화를 맞이하는 자연으로부터 경험된 관찰은 과거와 오늘의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피어나고 저물어가는 사계절의 위대한 흐름 속에서 시간마다 밤낮으로 변화하는 풍광을 경험한다. 산들의 중압감과 원시암석의 견고함, 전나무의 의젓한 성장과 꽃피는 풀밭의 수수하게 빛나는 찬란함(...)이 모든 것이 서로 떠밀고 몰아대면서 저 높은 곳에서 매일같이 펼쳐지는 일상의 현존재를 통해 춤추듯 변전해간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자신의 자리에서 경이로우면서도 숭고한 자태로 그 웅장함을 내비치며, 그 존재와 생명력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갈 수 있게 내 준 길목은 누구에게나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곳에 만들어진 도보는 작위적으로 꾸며진 포장도로이기보다는 흙과 돌, 풀 사이에서 지나가고 스쳐간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다. 어떤 길목보다도 자연 특유의 흙냄새와 푸른 잎에서 나오는 숲의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주변 곳곳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새소리, 꽃의 향기 등이 살며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자연의 풍경을 더 가까이 접한다. 우리의 감각을 빠르게 자극하고 안정시켜주는 곳이 있다면, 잠시 당신이 머물었던 그 장소, 바로 사진 속의 그 자연의 풍경이 아닐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벌레, 곤충 등의 온갖 생명체가 함께 공존하고, 그 공간을 공유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자생적으로 터득한 공생의 순간을 발견한다.


                                                                                  


아마 지금 이 시기는 어떤 때보다도 더 많이, 자연의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아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속에 더욱 짙어진 정신적 스트레스와 함께 잠시 자신을 위해서 휴식의 공간으로 발길을 돌린다면, 바로 자연의 길목 어딘가에 서 있을 것이다. 길을 걷다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혹은 지나가다 보이는 들꽃사이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선을 옮기며, 그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리고 근사한 사진작가처럼, 한 장의 장면을 포착한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머문다.



영원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도 영원히 사진속의 자연처럼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사계절이 있듯이 인간의 삶도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세월이라 부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연을 마주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인생도 그들을 닮고 싶고, 그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도시에서 생활을 하기 위한 열정을 가라앉히고, 갈증과 불안의 마음을 잠재우는 그 곳. 나무가 우거지고 풀들 사이를 거닐 수 있는 자연으로 가서 쉼을 가진다. 누군가는 자연의 풍경을 인공적으로 만든 장소, 아케이드에서 쇼핑을 하며 자신이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준비를 한다.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장소에서 삶을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진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회귀본능의 장소이자, 자신의 삶의 경로의 이탈에 변화를 주는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이 곳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영원함을 꿈꾸고, 변하지 않은. 변할 것을 아는. 그 찰나의 순간을. 카메라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표현한 이가 있다.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이다. 호크니에게 자연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여행지역에서 발견한 삶의 본질과 그 의미를 발견한 장소였다.



데이비드 호크니, <해돋이>, 영상이미지 일부 캡쳐본, 2021



이미 호크니의 존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면서, 한국에서는 2019년 이후로는 더욱 대중적으로 알려진 예술가이다. 또한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와 함께 호크니의 작품은 가격으로 그의 스타성을 알려주는 것만큼 그의 유명세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5월 한 달 동안 이어진 호크니의 영상미디어 <해돋이 :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2021)가 5개 도시,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 도쿄와 함께 삼성동 코엑스에서 대형 LED전광판에 소개되면서 한국에서의 그의 만남은 지속적으로 교류를 맺고 있다. 특히 호크니의 활동의 범주는 회화, 드로잉, 판화, 아이패드, LED 등 디지털매체로 확장되어가면서 그의 재료와 표현방식은 시대의 변화와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의 결합으로 발맞춰 가고 있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1967~)의 <날씨프로젝트>(2003)를 상기시키는 호크니의 기술적 방식은 해돋이의 색채와 두꺼운 붓질 사이를 오가는 캔버스 회화 특유의 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쩌면. 캔버스 위에 칠해진 호크니만의 강렬한 원색과 수평선 구도와 나무, 해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화면 속에서 초마다 변화하는 시간성을 담아냈다. 도시속의 전광판 LED를 통해서 이렇게 호크니의 자연을 접하게 되는 이벤트는 자연의 숭고함을 디지털문화를 통해서 체험하게 되고, 회화를 표현하는 도구와 방식이 회화와 기술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하는 계기로 연결된다.



데이비드 호크니, <요세미티 I, 2011 년 10 월 16일>, 2013



데이비드 호크니,  <No. 599, 2020년 11월 1일>, 2020(2020)(2020)


그래서인지 호크니의 아이패드로 제작한 자연의 풍경은 기술적으로 가미된 기계적 색감으로 어떤 색보다도 깨끗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의 원초적인 색채를 그대로 살린다. 예를 들어 <요세미티 I, 2011 년 10 월 16일 Yosemite I, October 16th 2011>(2013)를 보더라도, 원근감으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숲속의 나무와 산이기보다는 파랑과 노랑의 적절한 색의 혼합과 빛의 그림자를 잔잔하게 그려 넣었다. 그 뒤에 보이는 산은 멀리 있는 듯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그의 시선으로 본 산등성이에 물들여진 푸른빛은 고요하면서도 따뜻하다. 저녁이 찾아오는 인적이 드문 시간의 적막감이 느껴지면서도, 살며시 보이는 언덕 위의 싹이 트는 생명들의 존재감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한편 <No. 599, 2020년 11월 1일>(2020)에서는 프랑스 북부의 이 곳은 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풀, 그리고 물속에 비치는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 듯 살랑거리며 봄을 알린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느림의 미학



데이비드 호크니, 작업과정 



데이비드 호크니, 풍경



사실 호크니의 자연의 풍경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현장스케치가 그대로 묻어나는 작업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실내에서 사진을 보고 묘사가 가능한 아이패드와 다르게 캔버스 위에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은 직접 야외로 외출하여, 자신이 원하는 풍경 속에서 진행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 호크니는 나무, 들판, 길, 식물, 꽃 등을 관찰하며 자연의 현장을 더욱 주목하였는데, 그의 시선은 자연의 생명력과 그 존재들에 대한 의미 있는 해석이었다. 무엇보다도 호크니에게 자연은 풍경 속에서 전해지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담아내는 그 과정의 순수함을 여실이 보여준다. 자연을 벗 삼아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한 장소의 공간의 변화하는 풍경을 호크니는 붓과 물감을 들고 이동하여 자리를 잡는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는 자연에서 호크니는 지나가는 길목에서부터 자주 간 그 장소, 그 곳을 한 장면으로 포착하여, 그 풍경에서 느껴지는 향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하였다. 특히 호크니의 이런 면모는 인상주의자들에 의해서 전통처럼 내려온 풍경화에 대한 예의이자, 자연에 대한 숭고와 경이로움 감정을 대하는 자세를 연상시킨다. 패스트푸드처럼 빠르게 섭취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것은 자신이 체험한 자연을 화폭에 표현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그 장소를 경험하고 천천히 그 주변을 관찰하면서, 그 시작을 알리는 풍경화의 묘미는 호크니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크니, 작업과정



자연의 풍경을 정해져있는 규격의 화폭에 담아낸다는 것.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체험한 그 현장에서의 느낌. 그리고 그 안에서의 사유와 인식의 감정이 교묘하게 공존하는 인내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연이 화폭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처럼, 호크니는 캔버스를 자연에 대한 경의와 찰나의 순간 속에서, 모네가 <햇빛 속의 건초더미>(1891)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들판에 쌓인 건초더미에 비치는 빛의 변화가 그림자와 함께 스산하게 느껴지는 저녁 오후의 시간을 포착시키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처럼, 사실적인 재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지만 구도와 배치 그리고 풍경을 바라보는 각도에서 빛, 바람,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찰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호크니의 노력은 쉼이 없다. 자연 속에 들어가 그 곳에서 화폭을 펼치고, 화폭인지 자연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지점을 만들며, 그 장소와 몰아일체 되어 자연의 현장을 표현해내려는 그의 손에서. 이 순간 느껴지는 바람의 속도, 꽃의 향기, 뿌리에서부터 나뭇가지 사이로 뻗어 나오는 새로운 생명들의 존재가 영원할 것만 같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호크니, 그만의 붓질로 자연을 표현하다.



데이비드 호크니, <월드게이트, 이른 꽃>, 2009



데이비드 호크니, <러드스톤 근처의 호손 꽃>, 2008



호크니의 화폭에는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만의 붓 자국, 선, 그리고 점, 색이 묻어나면서 ‘호크니적 자연’의 탄생을 알린다. <월드게이트, 이른 꽃 Early Blossom, Woldgate>(2009)나 <러드스톤 근처의 호손 꽃 Hawthorne Blossom Near Rudston>(2008)도 호크니적 자연이 대표적인 작품인데, 그만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자연을 향한 그의 시선과 각도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월드게이트, 이른 꽃>(2009)을 보면, 길목을 중심으로 좌우에 펼쳐진 들판과 울창한 나무들 사이 곳곳에 보이는 작은 꽃들이 바람에 어우러진다. 영국 월드게이트의 한 지역에서, 멀어져가는 구름사이에서 끝없이 나아가는 길 지점 어딘가에 목적지가 있는지, 그 사이에 서 있는 호크니의 시선이 느껴진다. <러드스톤 근처의 호손 꽃 >(2008)에서도 흙길 위를 걷는 도보를 그려낸 <월드게이트, 이른 꽃>(2009)와 다르게 고르게 포장된 길목 사이를 두고 양방향에는 풀과 꽃, 나무가 어울러져 향기를 낸다. 그리고 그 사이에 꽃들과 수목을 가꾸는 정원사가 있는지. 가지런히 가꾸어 놓은 정원을 거닐 수 있는 길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길목 위를 환하게 비쳐주는 하늘에는 촘촘하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둔 구름들 사이에서, 따듯한 햇살이 느껴진다. 사실 <No. 599, 2020년 11월 1일>(2020)와 <요세미티 I, 2011 년 10 월 16일>(2013)과 다르게 회화적 표현에서 드러나는 호크니의 붓 자국과 색의 조화는 디지털 화질의 선명도와 색감에 비해서, 본래 물감이 가진 색상보다 뚜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호크니만의 섬세하면서도 강약조절의 템포가 느껴지는 공간적 표현과 깊이감에서 드러나는 명암과 채도가 질감 그 자체를 살리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더욱 존재감 있게 표현해냈다.




데이비드 호크니, <틱센데일 근처의 세 그루의 나무>, 2007



호크니만의 나무표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틱센데일 근처의 세 그루의 나무 Three Trees Near Thixendale>(2007)에서는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굵고 단단한 나무. 풍성한 나무의 짙은 녹색이 시선을 끌면서, 세필 붓으로 섬세하게 잎사귀를 표현한 듯하다. 그리고 늘 푸른 나무처럼 단단하게 서로를 지탱하며 서 있다. 그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잠시 쉬어갈 공간으로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햇살 속에 타오르는 듯, 들판은 더위를 먹으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서인지 나무의 푸름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의 현장스케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슬로우푸드를 만드는 과정처럼. 그의 작업과정은 천천히 물감을 섞고, 파렛트에서 대상에 맞는 색을 혼합한다. 그 와중에 자연을 한 번 바라보고, 살며시 붓을 던지듯 화폭에 선을 긋고 형태를 만든다. 색에서 면으로 만들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그리고 선에서 면으로 만들어지는 그 과정이 조합되면서, 천천히 화폭 속에는 다양한 자연의 생명체들이 살아나고. 그곳을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한다. <No. 599, 2020년 11월 1일>(2020)가 엽서 한 장에 그려진 그림과 같다면, 현장에서 그린 자연의 풍경은 붓 자국에서 느껴지는 힘과 색에서 표출되는 에너지가 더해져 자연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자연의 색을 발견하게 한다.



 자연에서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보여준 호크니




데이비드 호크니, 작업과정



자연의 일부 존재에 불과한 인간에게 쉼과 사유의 장소를 만드는 이 곳. 호크니에게는 자연을 향한 애정과 유년시절 매일 작성해본 관찰일기와 같이, 체험한 장소의 어느 지점에서 자연과 만났다.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가 <수평선>(2010~2012)에서와 같이 언덕 위에서 온전히 자신을 이해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공간과의 관계로 자아정체성에 집중하였다면, 호크니는 자연의 본질을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자연에서의 세심한 관찰과 그에 따른 묘사가 그의 시선에서 보이는 풍경이면서도, 자연으로부터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의 재발견이다. 보고 느끼면서, 그대로의 자연의 형체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자신 모습까지 찾아가는 호크니의 모습은 자연에 대한 순수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호크니적 자연은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나무의 연륜이 느껴지는 나이테의 흔적을 사실적으로 살리기보다는 단순하면서도 평면적인 표현으로 구성된 조화로 색의 질감으로 자칫 단조로움을 주면서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자연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강렬함이 있다. 언제나 곁에 머물러 있는 자연이면서도, 강렬한 색감의 자연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된 빈센트 반 고흐의 자연처럼. 호크니도 머무르고 싶고, 그 곳에 가보고 싶은 자연의 풍경으로 다가오게 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늦은 봄 터널>, 2006



데이비드 호크니, <입구>, 2019



그래서 호크니의 자연은 생소한 풍경이기보다는 오늘 우리가 여행으로 가본 장소이거나, 한 번쯤 지나가 본 길목이다. 이는 <늦은 봄 터널 Late Spring Tunnel>(2006)에서도 보면, 호크니는 중간지점에서 자리를 잡고, 늦은 봄기운을 느끼는 길목에서 울창한 나무의 잎사귀의 하늘거림과 잔잔한 풀들 사이에 다양한 식물의 종이 얽혀가며, 함께 하고 있는 길이다. 하늘은 어쩜 그렇게 푸른지 맑고 깨끗하다. <입구 The Entrance>(2019)에서도 아크릴물감으로 표현을 했기에 붓 자국은 섬세하면서도 투명함이 비쳐지는 푸른 잎들과 나무, 그리고 돌길로 포장된 길목이 더욱 산뜻한 느낌을 주면서, 과수원으로 향하는 기분이 든다. 멀리보이는 붉은색지붕의 창고형태의 집이 동네의 정취를 더욱 따듯하게 한다. 멀리에서는 푸른 언덕이 낮은 지역에 위치한 장소에 한적한 풍경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면서, 청량한 여름이 오고 있는 느낌을 감지하게 한다. 이런 호크니의 자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데이비드 호크니, <월트게이트에서 버튼 아그네스>, 2007




데이비드 호크니, <월드게이트 숲 Ⅲ, 5월 20일~21일>, 2006





데이비드 호크니, <월드게이트 숲, 11월 6일~9일>, 2006



호크니의 자연은 경험해본 적 있는 익숙한 풍경이기에 흥미롭고 그의 시선 역시 사진을 찍을 때 구도를 잡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에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과의 마주함에 있어 경이로운 순간이 느껴질 때, 호크니적 자연의 풍경에 발길이 닿을 수밖에 없다. 이런 감정은 그대로 <월트게이트에서 버튼 아그네스 Woldgate Lane to Burton Agnes>(2007)에서도 느껴지는데, 오랜 시간 뿌리내린 풀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며,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그랬듯이 또 꽃을 피우고 울창한 잎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정원사가 도착하여 미처 다듬지 못한 장소일지도. 혹은 자연 그대로 식물의 무한 번식을 지켜볼 수 있는 인적 드문 장소이다. 살아있다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이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들이 시간을 주도하고 있다.


그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하기 위한 이유인지 호크니는 <월드게이트 숲 Woldgate Woods Ⅲ, May 20~21>, <월드게이트 숲, 11월 6일~9일 woldgate woods, November 6~9>(2006)과 같은 여섯 개의 패널로 대형사이즈의 화폭 속에 그려진 자연과 만나게 했다. 숲에 들어온 이 순간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의 변화를 느끼며, 언제나 이 숲들의 울림처럼. 늘 푸른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지나가는 반복된 순환 속에서 자연의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호크니는 이처럼 자연을 감상하고 주변을 관찰하며, 자연의 풍경을 담아냈다. 과연 우리는 자연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질까? 분명한 건 호크니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바라볼 것이고, 표현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우리의 삶이 자연의 순리와 닮아있다는 사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삶의 여정은 한 그루의 나무가 울창한 숲이 되는 과정과 닮아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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