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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14. 2019

여름꽃으로 귀신쫓는 회화나무

회화나무 아래  꽃비 맞으며 한참 놀았다

작고 소소한 것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형태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령 퀼트나 안개꽃 같은 것. 무지개는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내겐 모호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상징을 이루고 있는, 과정도 결과도 모호함 뿐인 것. 매일이 미로를 헤매이는 날들인 바- 똑 떨어지는 것, 선명한 것들 안에서 궁리하고 질문하고 상상하는 게 더 재밌다. 어쩌면 인생은 그닥 복잡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신은 우리를 위해 아주 단순한 답을 숨겨놓았고 그 단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똬리처럼 꼬여있는 게 삶일지도.


어쨌거나 그건 내 취향일 뿐이고.

모호함이 건네는 또렷한 메시지들이 있다. 광장에서 피어난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이야기들은 커다란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작은 상처들이 모여서 견고한 질그릇이 완성된다. 처음의 작고 소소한 것들은 '힘있고 커다란' 작고 소소한 것이 되고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수십 장의 천조각으로 완성된 퀼트는 아일랜드 여인들의 비밀스런 메시지였고, 안개꽃은 품은 꽃이 시들 때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작은 꽃이 피는 큰나무 얘기를 해볼까.

모든 식물의 분류는 꽃 즉 열매가 기본이다.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 꽃이 피었던 모양으로 열리니까.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과 함께 우리나가 5대 거목 중 하나인 회화나무는 분류상 콩과에 속한다. 열매가 조로록 콩알처럼 달려서다. 둘레가 크고 우람한 수형에 비해 열매가 찌질하다 싶겠으나 나름 영리한 전략을 갖고 있다. 일단 많이 매달고 깍지까지 씌워놓으니 손실률이 적다. 한번 뿌리내리면 아름다운 수형으로 보는 이의 혼을 빼놓지만 아무곳이나 터를 삼지 않는다. 넉넉한 그늘을 만들지만 엄격하고 까다로운 이면이 있어 이래저래 양반 나무라 불린다.


지난해 겨울 흑회색 수피에 앙상한 가지만 보았었는데, 며칠 전 경희궁에서 그 아름다움에 눈을 씻고 왔다. 입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뜰을 감아걷다가 무심코 왼쪽을 봤는데, 커다란 나무에 황백색 꽃무더기가 울창했다.  만발한 자태가 어찌나 의연하고 아름답던지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붓는 안뜰을 내처 가로질렀다. 그때만해도 그게 회화나무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가 작고 소담한 꽃들이 오종종 모여있는 모습과 콩과목 특유의 이파리를 보고서야 다시 탄성이 나왔다. 무뚝뚝하고 엄숙하게만 보았던 회화나무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개하다니. 나무의 다정하고 순한 속내를 본 것 같았다.


쉽게 터를 삼지 않는다는 위엣말은 뿌리를 내릴 만큼 넉넉한 대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을의 초입에는 느티나무를 심고, 장터에는 은행나무를, 아낙들의 빨래터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면 상위 10% 세력가들의 정원에선 회화나무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특히 이 나무를 사랑해서 회화나무 '괴'자를 써서 '국괴목' 이라고 했다. ‘괴’자는 나무 목 변에 귀신 귀자가 합쳐졌다. 여름에 떠르르하게 하얀 꽃을 피워 한밤중에도 집안을 환하게 밝힘으로써 울안에 스미는 귀신을 쫓았다는 설에서 유래했다. 요즘 말로 '국민 회화나무'인 셈. 또한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많이 난대서 특히 문필가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니, 임금이라고 달랐으랴. 내가 본 경희궁 앞뜰에 아름드리 한 그루, 사도세자의 마지막을 지켰을 창경궁 선인문 앞에 비감하게 또 한 그루가 서있다. 케케묵은 이야기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여타 나무들이 꽃 떨궈 열매 매달 즈음 비로소 만개하기 때문에 엉덩이 들썩이며 붕붕붕 꽃을 찾는 꿀벌들에게 훌륭한 밀원이 된다.  


회화나무는 문득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가면 귀티가 난다. 8월 뙤약볕을 버티고 선 회화나무 꽃무더기는 작고 소소한 시간으로 채워가는 일상의 힘을 말해준다. 담대하되 성실한 하루하루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소비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에누리없이 나의 인생이 된다. 아름답고 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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