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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이 민언냐 Aug 10. 2022

하노이의 쇼 미 더 기프트!

남편 생일 2022           일러스트by하노이민언냐

“Are you sure? 너 확실해? 후회하지 않겠어? 이거 한 두장으로 끝날 게 아니디.”


모든 준비는 끝났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팔을 걷어붙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준비해둔 재료를 꺼낸다. 모두가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잊으래야 잊히지 않는 뜨거운 숫자, 팔팔한 8월 8일! 바로 남편의 사십 세 짤 생일이다. 냉장고는 이미 준비 완료! 불고기, 미역국, 계란, 버섯 각종 채소, 해산물 등 남편이 좋아하는 나물에 파김치까지! 완벽하다. 전투에 임하는 전사가 되어 줄무늬 앞치마의 끈을 꽉 맸다.


올해는 특히 쭌이와 쩡이가 더 설레어했다. 카드와 편지는 물론 전 재산을 올인한 선물까지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용돈으로 선물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스탬프 표 덕분이다. 학원을 가지 않는 아이들의 부모라면 이런 ‘상’ 제도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긴장감이 떨어지기 쉬운 홈스쿨링에 학습 동기를 부여하고자 시작한 것이다. 원래 용돈은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염원했던 장난감이나 물건을 사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바로 아빠 생일 선물을 통 크게 쏜 것이다. 스탬프는 열 개? 노옵! 그럼 스무 개? 아니다. 무려 70개를 꽉 채워야 한다. (응, 엄마는 백 개짜리로 만들고 싶었지만 참았단다.) 사실 70 개의 스탬프를 매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탬프에 관대하지 못한 엄마는 매번 큰 상을 하사하듯 신중하게 주는 편이다. (쩨쩨한 엄마라 미안하다, 얘들아.) 그래서 표를 모두 채우려면 수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 둘 차곡차곡 모은 스탬프로 소정의 용돈을 모으는 아이들에게 전재산을 털어 선물을 산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결심인 셈이다.

제일 먼저 아빠의 선물을 산 건 쩡이다. 지난 방콕 여행에서 함께 하지 못한 아빠를 위해 공항의 면세점에서 지갑을 샀다. 낡아서 솔기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아부지의 지갑이 신경이 쓰였던 걸까. 딸은 가죽 지갑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나스’ 립스틱에 영혼이 빼앗겨 허우적거렸던 엄마는 부끄럽다. 그리고 연착의 연착을 반복하던 비행기가 이륙하기 30분 전, 갑자기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생일이 다가오니 지갑을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곧 생일이잖아! 지갑 봐 둔 게 있다. 내 용돈으로 사께!"

"뭐.. 뭐? 이제 곧 탑승 시간인데? 어딘지도 모르잖아."

“내가 어딘 줄 안다. 엄마, 빨리!”


표정을 보니 진지했다. 쉽게 뜻이 꺾일 것 같지 않다. 이미 탑승을 알리는 영어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우린 달렸다. 아부지를 향한 뜨거운 딸의 효심을 막을 자는 누구냐. 하지만 방향 감각이 신생아 수준인 엄마에게는 모든 매장이 다 똑같아 보이는 게 함정! 나의 적은 나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파 속을 꼬르륵 대며 헤맬 뿐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방콕의 국제공항은 규모가 어마어마하기로 유명하지 말입니다.) 하여 길치에게는 직진만이 답이다. 무작정 내달리던 중, 쩡이는 가던 걸음을 멈추며 지나친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차,  되돌아가야 한다. 만 열 살이 된 니가 사십이 넘은 나보다 낫구나! 방향은 다음 생에 챙길게! 우리는 역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이륙 15분 남기고 지갑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이로써 007 작전에 버금가는 선물 사기 미션, 클리어!

“쩡아, 엄마 가방에 넣어 줄까?”

“아니, 내가 들고 갈게.”


쩡이는 지갑이 든 작은 쇼핑백을 보물인 양 꼭 품고 비행기에 탔다. 그리고 착석과 동시에 꾸벅꾸벅 졸더니, 하노이에 도착해서도 결코 쇼핑백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 뒤늦은 여동생의 선전에 뒤늦은 후회로 절규하는 빙구 아들, 쭌이가 있었고 말이다. 공항 와이파이와 함께 은혜로운 게임 타임을 보내던 쭌이는 선물의 정체를 하노이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 선물을 쉽게 해결할 찬스를 놓쳤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쭌이는 잘 알고 있다. 아빠는 아들을 놀릴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돌아오는 건 구박뿐이다. 아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빠의 ‘선물 타령’과 무한 놀림으로 모두가 즐겁지만 혼자 웃지 못할 생일 파티가 쭌이 앞에 펼쳐질 것이다. 덤으로 기세 등등해한 여동생을 보는 것은 더 고통스럽고 말이다. 쭌이는 재빠르게 쩡이를 포섭하려고 했다. 자신도 지갑의 반을 부담할 테니, 함께 준비한 것으로 하자고 했다. 그 어디에서도 만난 적이 없던 세상 달콤한 말들과 오빠 미소는 뭐냐! 태세 전환이 빠르시군요! 만 12세의 아들에게서 인간의 양면성을 보고야 만 엄마는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쩡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단호박 여동생은 자신과 엄마가 공항 면세점을 뛰어다닐 동안 오빠는 유튜브 보고 게임만 했다고 반박한다. 그래, 이건 빼박이다! 유 윈, 쩡이 승! 함께 선물을 준비한 걸로 하자던 오빠의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결국 쭌이는 쩡이와의 선물을 건 대결을 선포했다.


“야! **쩡!(여동생에게 불만이 있을 때는 성까지 붙여 풀네임으로 호령하는 쭌이다.) 두고 봐라! 내가 더 좋은 선물 살 거다.”

더 멋진 선물을 사는데 자신의 전재산을 투척하겠다나. 갑분 선물을 건 자존심 대결이 시작되었다. 공부로는 보기 힘든 호승심이다. 선물 경쟁, '쇼 미 더 머니'가 아닌 '쇼 미 더 기프트', 신선! 선물에 대한 굳은 결의를 보이는 쭌이는 넓어진 콧 평수와 꽉 진 하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오동통한 주먹을 보이며 말했다. 런 결심은 아들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일찍이 재화에 밝았던 쭌이는 자신의 용돈을 신중하게 쓰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가끔 가족을 위해 선물을 사곤 했던 쩡이와 달리 쭌이는 사람을 녹이는 애교와 편지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로 뭉개는 스타일이다. 뼛속까지 자본주의의 결정체인 아들의 용단! 낯설다! 그리고 그 선언은 실행에 옮겨졌다. 아빠의 생일이 나흘 앞으로 다가오니 쭌이는 어떤 선물을 살지 이리저리 탐색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선이 현관으로 꽂혔다. 하얗다가 회색이 되어가는 운동화, 빙고! 얌전히 앉아서 아빠의 신발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긴 쭌이였다. 그리고 다음날, 롯데 센터의 나이키 매장을 찾았다. 메이커를 아는 부산 사나이, 쭌이! 그래, 립스틱은 나스, 신발은 나이키지. 역시 뭘 좀 아는 녀석이다.


나이키를 사랑하는 만 12세 아들; “아빠! 이번 생일은 기대해도 좋다. 기대해래이!”

면세점을 이미 알아버린 만 10세 딸; “어, 아빠! 우리가 진짜 좋은 거 준비했다.”

리액션 천재, 아빠; “오~ 진짜가? 뭔데?”

아이들; "그건 비밀! 서프라이즈야!"

이날 쭌이는 자신의 지갑을 열고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다. 이백 만동 (한화로 십만 원)을 훨씬 넘는 화이트 톤의 상큼한 그린 로고가 들어간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심지어 세일을 하지 않는 신상이었다. “괜찮나? 이거 사도 되겠나? 확실해?”하고 걱정스럽게 묻는 엄마에게 싱긋이 웃는다. 쩡이도 쭌이도 아빠 생일인데 이 정도는 써야지~ 하며 답을 한다. 기세 등등한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웃음이 피식 났다. 쩡이도 함께 아빠 선물을 고르는 게 신이 났는지 매장을 빙글빙글 돌며 신발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285의 무적함대 운동화는 쭌이의 품에 들어왔다. 서프라이즈를 위해 침실에 숨겨둔 선물을 체크한다고 수백 번을 들락거리던 아들과 딸! 그리고 포장지를 꺼내 열심히 선물을 꾸미고 편지까지 참하게 쓴다. 그날 이후 아빠가 퇴근하면 아이들은 선물에 대해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입을 씰룩였다. 사실 남편은 이미 선물 박스를 봐버렸지만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그 센스 칭찬해~ (285 사이즈의 거대한 운동화 박스를 침대 옆에 뒀으니, 눈에 안 띄기가 힘들지.)

그리고 대망의 생일! 두둥! 남편은 생일이니만큼 특별히 정시 칼퇴근을 했다. 예상 귀가 시간은 7시 15분! 생일 축하곡의 악보를 다운로드하여 직접 악기를 연주하기로 한 아이들은 아빠가 현관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맹연습을 했다. 쭌이는 바이올린, 쩡이는 피리를 연주한다. 이렇게 진지하게 연습하는 건 처음이다. 브라보!


"엄마, 하늘 진짜 예쁘다! 봐봐!"

합주를 하던 아이들을 갑자기 연습을 멈추었다. '솔'톤으로 올라간 쩡이는 하늘이 예쁘다고 신나서 창문으로 달려갔다. 포기김치를 써느라 정신이 없던 나도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핫! 하늘 저편이 분홍빛으로 봉긋하게 피어올랐다.  쭌이도 스마트 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오후 내내 비가 오더니 저녁때가 되어서야 게인 하늘! 그리고 선물같이 찾아온 볼 빨간 하이다. 김치를 썰다만 내 손 끝도 하늘도 남편의 생일 어여삐 물들다.

피. 에스. 쭌이는 아빠가 자신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갔는지, 계속 톡을 보냈고 남편도 마음에 쏙 다며 사진을 찍어 답했다. 아, 훈훈해! 그럼...나.. 나도 내년에는 선물을 기대해봐도 되는 걸까. 쓰읍~ 슬쩍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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