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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H Nov 17. 2021

창덕궁의 숨겨진 20세기 (1)

창덕궁 기관실과 "아메리카제 뽀이라"

<사진 1> 대조전 선평문에서 오른쪽을 바라본 모습. 희정당과 대조전 권역을 잇는 행각 사이로 특이한 구조물이 보인다.


지금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 사이의 공간, 즉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 宣平門 앞에서 오른쪽 행랑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면 행랑 너머로 높은 돌담이 놓여있는 사이에 희한한 돌 구조물이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조전 일곽을 돌아보고 나와서 성정각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동선에서도 이 육중한 돌 구조물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돌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별 생각없이 지나가곤 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부분이 아주 육중한 돌과 콘크리트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키 큰 사람들은 돌담 너머를 살펴보면 커다란 콘크리트 옹벽과 철제 사닥다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게 된다.


<사진 2> 옛 창덕궁 기관실의 잔해. 2007년 자료사진.


이 미스터리한 구조물의 정체는 바로 창덕궁 기관실 機關室 (보일러실). 1920년 7월 완공된 이 건물은, 창덕궁의 내전 일곽, 즉 희정당 및 대조전 등에 난방과 온수를 공급하기 위한 스팀 보일러를 운전하던 곳이었다. 현재 지상 건축물의 대부분은 파손되어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지만,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아직도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던 거대한 벽돌조 공간과, 창덕궁 내전 방향으로 통하는 거대한 지하 터널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보이는 돌 구조물의 정체는 사실 이 기관실 상부의 환기창이 있던 자리를 돌로 막아놓은 부분이다.


<사진 3> 옛 창덕궁 기관실의 내부. 2012년 필자 촬영. 폐쇄된 환기창과, 급탕 파이프를 설치해 연결했던 터널이 보인다.

창덕궁에 이렇게 큰 기관실이 설치되게 된 연유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17년 11월 10일 오후 5시 반 무렵, 대조전 서쪽에 있던 궁녀들의 환의실 換衣室 (혹은 갱의실 更衣室) 구들방 바닥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고, 이내 대조전은 물론 희정당과 경훈각 등 내전 건물들 대부분이 2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매일신보>의 호외와 후속 기사를 보면, 불이 난 것을 먼저 목격한 윤비는 불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순종이 있는 건물 동쪽으로 건너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은 금세 건물 전체로 번졌고, 대조전 대청마루에 걸려있던 등유 램프가 폭발하면서 더더욱 거세게 번져갔다. 이에 순종과 윤비는 내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스립바" (슬리퍼) 차림에 평상복, 지팡이와 두세가지 귀중품만 손에 든 채 불타는 대조전을 빠져 나왔다. 이들은 내관과 궁녀들의 등에 업힌 채 처음에는 희정당 바로 옆인 보춘정(성정각)으로 향했으나, 불이 난 곳에서 너무 가깝다는 측근들의 의견을 듣고 이내 자동차를 타고 후원으로 넘어가 연경당에 임시로 머물게 됐다. 순종 내외는 화재가 얼추 진압된 이후 다시 성정각으로 돌아왔다가 그 며칠 뒤부터 1920년에 다시 내전 건물들이 지어지기 전까지 계속 낙선재에 머물었다.


창덕궁의 급작스러운 화재 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초입의 추운 날씨를 견디려고 궁녀들이 온돌에 불을 지피다가 이것이 과열되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 화재사고는 조선총독부에게는 환호성을 지를 만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총독부는 1910년 병합 직후부터 온돌이 조선인을 나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숲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고, 나아가서는 자주 벌어지는 화재 사고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온돌의 폐지를 장려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창덕궁 화재는 어떻게 보면 아주 좋은 쇼케이스였다. 


그리하여 1918년 1월 본격적으로 창덕궁 내전의 중건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이왕직 영선과와 조선총독부는 이 건축물에서 온돌을 완전히 제거해 없애기로 하고, 대신 이 건물들의 난방을 당시로서는 최신인 라디에이터 습식 보일러 (수난로 水暖爐)로 하도록 계획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이왕 전하"가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선전 효과는 실로 다대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순종은 1915년부터 이왕직과 조선총독부에 계속해서 창덕궁의 전각이 낡고 협소하니 양관 洋館을 지어달라고 꾸준히 요청한 바가 있었다. 이에 이왕직은 이를 받아들여 1916년 말 지상 2층, 지하 1층의 큼직한 철근 콘크리트조 양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1917년 하반기에는 이미 그 터를 닦아놓고 설계를 마무리하는 단계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1917년 11월의 화재로 창덕궁 내전이 모조리 파괴되면서 양관 건축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대신 양관을 짓기 위해 마련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 시멘트 등을 창덕궁 내전의 하부구조 및 기반시설 건축에 사용하기로 되었다. 


<사진 4> 1916년 설계된 창덕궁 내전 양관 응접실 투시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미 이 단계에서부터 창덕궁 내전의 지상 건축물은 경복궁 전각들을 옮겨짓기로 합의가 된 상태였다. 말 그대로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건물을 단순히 이축하는 공사였다면 이 공사는 상당히 금방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공사는 꼬박 3개년을 꽉 채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창덕궁 내전 일대의 대대적인 철근 콘크리트 타설 공사 때문이었다. 


<매일신보>의 보도 등을 보면, 이때의 공사는 기존에 희정당과 대조전 등이 있던 지대 거의 전체를 다 파내어 철근 콘크리트로 지반을 다시 타설하고, 스팀 보일러의 급탕 파이프가 들어갈 터널과 그 관리 공간, 석탄 창고,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시설물들을 지하에 짓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대형 공사였다. 당시 이 공사를 맡은 이는  일본인 건축업자인 타카시마 카네스케 高島周祐와, 서대문 부근에서 급탕시설 설치와 각종 자재 제작을 하던 스기야마 히사시 杉山久였다. 


이 과정에서 1908년에 영국인 수도기술자 휴 개럿 포스터-바햄 Hugh Garratt Foster-Barham이 창덕궁에 매설해서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던 상하수도 시설까지 대부분 뜯어 다시 만들게 되었고, 이 때문에 공사의 규모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시간 역시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 사이 1919년 1월 고종의 승하와 3.1운동 등으로 공사가 계속 지체된 것은 덤이다. 


마침내 창덕궁 내전의 건축공사는 3개년을 꼬박 다 채운 1920년 12월에야 완성되어, 이듬해인 1921년 2월 2일에 순종과 윤비가 대조전으로 이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종 내외가 이어를 한 그 날부터 기관실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육중한 "아메리카제의 뽀이라" 두 대가 설치된 이 곳에는 화부실 火夫室과 석탄 창고, 급탕실, 관리실 등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4월부터 10월까지는 화부 5명과 관리자 2명이, 11월부터 3월까지는 화부 10명과 관리자 4명이 근무하며 순종과 윤비, 그리고 기타 이왕가 사람들과 측근들의 겨울철 따뜻함과 편안함을 위해 쉼없이 노동했다. 


<사진 5> 옛 창덕궁 기관실의 관리실 모습. 2012년 필자 촬영. 현재는 폐쇄된 내부 계단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 구조이다.


1920년대 당시에도 기관실의 지상 건축물은 밖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관실의 보일러에서 나오는 연기를 빼기 위한 높은 콘크리트 굴뚝이 관물헌 뒷편에 높이 솟아있었을 뿐이었다. 1949년에 구황실재산총국이 그린 <창덕궁평면도> 를 보면, 당시 기관실로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후원으로 통하는 대문을 열고 그 왼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이 길을 통해 석탄의 운반과 화부들, 잡역부들, 관리인들이 출퇴근하곤 했다. 이곳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물은 희정당과 대조전 지하에 매설된 급탕 파이프를 통해 이들 건물에 있는 라디에이터를 데우며 난방을 공급했고, 기관실을 관통하는 상수도 파이프를 통해 수도가 설치되어 있던 다른 전각에 온수를 공급하기도 했다.   


<사진 6> 1949년 구황실재산총국이 그린 <창덕궁평면도>에 표시된 기관실과 그 통로의 모습.


그러나 당시로서는 최첨단 호화시설이었던 이 스팀 난방 방식을 정작 순종 내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대조전에서 궁녀로 일했고 이후 1966년 윤비가 사망할때까지 그를 곁에서 모셨던 김명길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순종은 라디에이터가 내뿜는 열이 자신의 기관지에 좋지 않다며 자꾸만 이를 멀리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애초에 조선총독부가 원했던 것처럼 온돌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안 자체에 순종이 노발대발하며 이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명색이 전 황제인데 자기에게 익숙한 생활습관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받는 것이 불쾌했던 듯 하다.


실제로 순종과 윤비의 요청으로 인해 결국 대조전에는 온돌방이 놓이게 되었는데,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대조전에 놓인 온돌은 종래의 구들장 대신 콘크리트와 내화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그 구체적인 구조를 잘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런 식의 "타협적" 건축은 1920년대 이후 총독부가 온돌 폐지 대신 개량운동을 펼쳤던 것과도 다소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6년 가량 운영되던 창덕궁 기관실은 그러나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의 일기로 승하하면서 운영이 중단되었다. 순종이 죽은 뒤 윤비는 계속 낙선재에만 (*1929년 이후에는 신낙선재에서) 기거했고, 여기에는 별도의 난방 시설 및 급탕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큼직한 기관실을 운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가끔씩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새로운 "이왕 전하"의 자격으로 조선에 들를적마다  대조전에서 며칠 씩 묵다 간 것을 제외하고는 내전 공간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 기관실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망가져갔다. 


<사진 7> 1950년대 항공사진에 찍혀있는 창덕궁 기관실과 기관실의 굴뚝 모습.
<사진 8> 1930년대 대조전 대청의 모습. 커다란 라디에이터가 바닥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기관실이 언제 공식적으로 폐쇄되었는가는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44년 11월 16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창덕궁 고원, 화부, 잡역부" 등을 해임한다는 짧은 기록이 있어서, 아마도 전쟁 말기에 없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창덕궁 기관실 내부는 물론이고 희정당의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라디에이터와 급탕 파이프 등등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데, 이것은 전쟁 말기의 금속공출로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명확한 문서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기관실이 운영을 완전히 중단한 이후로도 기관실의 유일한 지상구조물인 콘크리트 굴뚝은 한동안 의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촬영된 여러 항공사진에서 이 굴뚝의 존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지금 이 곳에는 굴뚝의 형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고, 기관실의 지하구조와 지붕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되어 매몰된 상태이다. 굴뚝이 없어진 것은 아마 1972년부터 시작된 창덕궁의 "정화 공사" 과정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추측된다. 현재의 지도와 옛 평면도를 놓고 비교해보면 담장과 대문으로 가로막힌 좁은 오솔길로 되어 있던 후원 진입로를 지금의 넓은 시멘트포장 도로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이 굴뚝이 서 있던 지점과 그 주변을 몽땅 쓸고 지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창덕궁 기관실의 남은 잔해는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고 있다. 혹자는 옛날 난방 시설 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우리가 보존하거나 챙겨봐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해두건대, 궁궐이란 단순히 임금과 양반 귀족들만의 공간이 아닌, 그 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던 수천 명의 하인, 내관, 궁녀, 잡역부, 화부 등등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2014년에 문화재청이 희정당 활용방안을 모색하면서 이 기관실 잔해를 가로막고 있는 돌담을 허물고 유리 천장을 설치해서 그 내부를 보여줄 계획을 제안한 바도 있지만, 역사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문화재위원회에 의해 거부되어 백지화된 바 있다. 예산을 많이 들게 하지 않고자 한다면 그저 작은 설명판 하나라도 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텐데, 현실은 아직 요원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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