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짊어지고 세계 유랑 ‘21세기 유목민’
2011년 리만 머핀 갤러리 개인전에 나온 반투명 섬유로 된 집
‘집’을 가방 안에 넣고 미국, 유럽, 아시아로 유랑하는 중진작가 서도호, 오랫동안 뉴욕에서 살아온 그는 최근 맨하탄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쳤다. 다시 짐을 싸고 있는 그를 맨하탄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집에 모든 것이
“떠난다는 개념에는 늘 미련이 남고, 어디서나 항상 짧은 시간 머물고 떠나니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뉴욕만의 독특한 식당 분위기를 즐기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1년에 보통 15개의 전시회를 열고 있는 서도호(49), 사람들은 그를 ‘현대적 노매드(Nomad)’라 부른다. 정착의 개념보다 떠돌이 유목민을 떠올리는 것이다. “집을 떠났고 또 전시 등의 이유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작품 자체가 ‘집’의 불정착성과 반복성에 대한 작업이다보니 그런 것 같다. 집에 모든 것이 있다. 다양한 문화의 모든 경험 축적된 집
이 내 화두이다.”는 그의 작품세계 뿌리는 서울 성북동 한옥이다.
천으로 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 회화과를 1994년 졸업한 후 1년간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면서부터다. ‘손바느질과 미싱작업을 하며 바늘에 숱하게 찔렸다’는 그다. ‘서울집/ LA집’, ‘완벽한 집’, ‘집안의 집’, ‘브릿징 홈’ 외에도 지난 2000년부터 전속작가가 된 리만 머핀 갤러리의 올해 개인전 ‘떨어진 별 1/5’에 반투명 섬유로 된 숱한 집을 지었다. ‘떨어진 별 1/5’은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의 작가가 살던 아파트에 서울 한옥집이 날아와 충돌후 터를 잡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 익숙함과 낯섬, 거주민과 이방인의 이야기이자 미국 이주 경험과 적응이다. 그 역시 이민자이기에 한국의 집에 대한 기억, 향수를 미국땅에 함께 가지고 왔다.
“처음부터 미국에서의 삶이 어렵진 않았다. 개인적인 이유, 즉 전처인 시민권자 아내를 따라 1991년 이민을 왔고 미술과 영어공부를 했고 미술계에 서서히 정착했다.” 뉴욕 집은 예일대 졸업후인 1997년부터 14년동안 살다가 지난 9월말로 한 곳을 정리하고 바로 그 옆 스튜디오에서 산지 1년반째이다. “전시는 4~5년전부터 준비하고 여러 곳에서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디어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이디어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떠오르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 나오기도 하고, 아이디어 정리에만 6~7개월 걸리기도 한다. 여행 중간에 공항이나 비행기에서 스케치도 하고,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대로 설치작업화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뉴욕에서는 대형전문회사와 첨단기술작업, 런던에서는 구상과 드로잉, 서울 성북동 집근처 작업실에서는 천 작업 등을 주로 한다고. “작년 한해동안 비행기를 100번 정도 탔다. 업이다. 전시 초대 받고서, 설치작업 하러, 오프닝
때, 한곳에 여러 번 가게 된다”는 그는 그만큼 자신의 작품을 철두철미하게 마무리한다. 서도호의 작품을 살펴보면 18만개 플라스틱 인형이 유리판을 지탱하고 있고 구둣발이 위에서 누르고, 관람객이 그 위를 걷도록 된 ‘바닥’과 군대와 독재 시대를 거친 작가의 지난날이 보이는 ‘유니폼’, 그 외 ‘낙하산병’과 ‘카르마’ 등의 대작 뒤에 섬세하고 강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큰 스케일의 작품을 구상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냥 크기만 한 작품이 아니라 항상 섬세한 디테일이 같이 있는 그런 작품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내 작품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우주가 다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지 않나 싶다”고 한다. 작품소재는 천, 유리, 플라스틱, 강철 등 다양하지만 어느 것이나 대중에게 아름답고 절제된 충격을 준다. 또 그의 작품은 적어도 난해하지 않다. 관객이 작가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무한대로 상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점이 좋다.
서도호는 화가로서의 데뷔는 늦은 셈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해양생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수학점수가 안나왔다. 서울대와 대학원 동양학과를 졸업했지만 미술을 평생 하리라 생각 안했다. 8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대표 3인
중 한명으로 선정됐는데 현지에 가서 외국작가들 작품을 보고 놀랐다. 미국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적성을 찾다가 30대중반부터 설치작업을 결심했고 33세에 개인전으로 데뷔했다.”
▲국제무대에 우뚝 서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된 서도호는 7만여개의 군대 인식표를 이어붙인 갑옷두루마기 ‘Some/one’과 고교생 4만여명의 사진을 스캔해 벽지로 제작한 ‘Who are we’로 호평을 받았다. 그해 휘트니미술관 필립모리스 분관 개인전과 시애틀 미술관 전시를 거치며 국제무대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6년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에서, 2009년 텍사스 휴스턴 미술관에서도 서도호의 작품을 구입, 전시했다.
2010년에는 친동생인 건축가 서을호와 공동으로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 초대받아 자르디니 공원의 메인 전시관에 ‘블루 프린트(Blue Print)’를 선보여 뉴욕집과 성북동 한옥, 베니스 빌라 모습 등,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환상적인 느낌으로 격찬을 받기도 했다.그의 작품은 모마, 구겐하임, 위트니, 시애틀 뮤지엄 등 수많은 뮤지엄에서 사갔다.“작품이 떠나가면 그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하니 큰 애착은 없다. 작품비는 모두 새로운 작품제작에 쓰인다, 그러다보니 갤러리에 빚 아닌 빚도 있고, 남는 장사가 아니에요”하고 짧은
머리 미소년처럼 티없이 밝게 웃는 서도호.
그는 “완성된 작품을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팔아야 하는게 힘들다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래서 일단 팔린 작품은 나중에 다시 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지 할 때가 있다. 예를들면 예일대 시절 만든 벽지작품 같은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하는 것에 재미가 있다. 힘들어도 좋다. 그러니까 하고 있고 계속 매일 매일 해가다보면 5년이 되고 10년이 되지 않을까. 10년후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고 자신의 10년후, 20년후 모습을 정리한다.
서도호는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바라는 것이 단 한가지 있다.
“작품 앞에서 단 1초만이라도 쉴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변호사 전문직을 지닌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게 뭐지? 하는 관심, 중요한 자신의 일을 순간 모두 잊고 휴식, 철학, 사색, 공감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것.내년에는 한국 리움갤러리 개인전, 히로시마와 카나자와에서 개인전이 있고 2013년에는 맨하탄 매디슨 스퀘어팍 23가 야외에서 거대한 설치작을 전시하며 리만 머핀 갤러리 개인전도 있다.
1962년 동양화가 서세옥씨와 정민자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서도호는 10살 때 아버지가 지은 한옥에 살며 한옥의 안과 밖에서 문화적 충돌을 겪어왔다.“한옥에서는 창호지 사이로 소리가 다 들린다. 새소리, 바람소리, 인위적인 소리 등 독특한 소리가 기억난다. 그만큼 한국집은 문화와 자연이 소통한다”는 그의 한옥 사랑에 뉴욕 근교에 한옥 지을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한옥과 서양식(집속의 집같은)이 융합된 집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다, 상상속의 집 같은. 그런데 평범한 라이프지만 역마살이 끼어 계속 돌아다니게 한다.”는 그다. 정신적 뿌리를 서울에 두고 이민자로서 국경 없는 삶, 그러나 생각이 자유롭게 유목하는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서도호, 그래서 미주 한인들은 그의 작품에서 공감과 상상력을 끌어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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