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섬을 예술 섬으로… 日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

입력 2017.07.01 08:00

암으로 내장 5개 제거한 건축 거장
"삶도 건축도…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

암 투병 중 어렵게 WEEKLY BIZ 인터뷰에 응한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5)를 만난 곳은 병상이 아니었다. 오사카 번화가 우메다(梅田)에 있는 그의 건축 사무소였다.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4층 서재였다.

안도는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이름 날리던 3년 전 암 선고를 받았다. 정기검진에서 '쓸개와 췌장의 합류 지점에 악성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이 나왔다. 건강을 자신했고 몸 관리에도 각별했던 그로서는 충격이었다. 가족과 직원들에게 급하게 유언장까지 쓰고 종양 제거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고비는 넘겼지만 몸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안도 다다오의 대표작인 나오시마 프로젝트 중 하나인 지추(地中) 미술관 내부 모습. 건물의 공간과 전시품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어우러지도록 꾸몄다. /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안도 다다오의 대표작인 나오시마 프로젝트 중 하나인 지추(地中) 미술관 내부 모습. 건물의 공간과 전시품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어우러지도록 꾸몄다. /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
이번에 만났을 때 그의 목소리엔 날카로운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다. 발음까지 새는 통에 첫인상은 말 걸기조차 힘든 환자였다. 그와의 만남이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이라는 짐작도 해봤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몸 상태를 묻자 별거 아니라는 듯 껄껄 웃음소리부터 냈다. "쓸개도 빼고, 쓸개관도 빼고, 비장도 빼고, 십이지장도 빼고, 췌장도 빼고. 내장 기관 5개를 제거했어요. 덕분에 몸이 좀 가벼워졌죠. 허허허."

팔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였지만, 안도는 오는 9월 도쿄에서 열릴 전시회를 직접 지휘하는 등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인터뷰 직전에도 "할 일이 쌓여 있다"며 시간을 10분만 내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가벼운 실랑이까지 벌였을 정도였다. 무엇이 죽음을 문턱에 앞둔 그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일까.

"재능은 모두에게 잊힐 나이에 꽃 피워"

―암 투병 중인데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내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에도 건축물을 만들었다. 이 사무실도 작년에 직접 개조했다. 올해 9월 도쿄에서 열릴 전시회에선 '빛의 교회'(그의 대표작으로 오사카에 있다)의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려 한다."

―일보다는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

"10대 후반부터 일을 시작한 이래 큰 병 앓았던 적이 없다. 남보다 건강에 두 배는 더 신경을 써왔기 때문에 (암 선고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맞다. 9시간 넘게 수술을 받았지만 다행히 예기치 않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매일 5㎞씩 걷고, 5㎏짜리 아령을 드는 운동을 반복하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도 더 많은 것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건축도 삶도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다. 재능은 20·30대가 아니라 모두에게 잊힐 때쯤 꽃을 피운다. 올해 일흔다섯인데 아흔 살까지는 살고 싶다. 그러니 15년은 더 일할 수 있지 않겠나."
안도 다다오 / 남민우 기자
안도 다다오 / 남민우 기자

"인생에 트러블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

1941년 오사카시 변두리에서 태어난 안도는 중학교 시절부터 건축가 꿈을 키웠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데다 학교 성적도 좋지 않은 편이라 대학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공업고 2학년 땐 생계를 위해 복싱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20대 들어 독학으로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1969년 스물여덟 때 오사카에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건축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나는 대학을 가지도, 전문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지도 몰랐다. (대학에서) 4년 걸려 이해하는 것을 1년 만에 독파하자는 마음이었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오로지 책과 싸웠다. 그것이 최선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젊었을 때 전기(傳記)를 많이 읽은 것도 도움이 됐다. 성공한 인물들의 성장 과정을 보면 결국 재미를 느끼는 일에 자신의 모든 걸 쏟은 경우가 많다. 사진도 그림도 건축도 마찬가지 아닐까. 본인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것에 재밌어하고 꼭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지다. 나는 건축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만큼 만들고 싶은 것의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그 아이디어 개수만큼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본인 작품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을 꼽는다면.

"스미요시노나가야(住吉の長屋)라 불리는 주택이다. 폭 3.6m, 길이 14.4m의 매우 작은 건축물이다. 1975년 설계했다. 연립주택을 3등분해 가운데 공간을 지붕 없는 마당으로 만들고, 창문이 없는 콘크리트 벽을 쌓아 외부와 차단시켰다. 이 집은 냉방도 난방도 없다. 오로지 태양과 바람으로만 생활하도록 꾸몄다. 빛이나 바람 등 자연 요소가 집 중앙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비좁은 공간 속에 커다란 우주를 만들고 싶었다. 이 집을 처음 공개했을 땐 평판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에는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은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도 자신처럼 투쟁하는 삶을 권해주고 싶은가.

"우리 세대 때만 해도 모두가 투쟁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사회가 평화롭고 안정된 덕분에 대다수 젊은이가 투쟁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안락한 삶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아진 덕분에 치열하게 투쟁하는 사람은 군중 속에서 더 강하게 보일 수 있게 됐다. 불행히도 한국도 일본도 엘리트는 난관을 극복하려는 대신 공부에만 너무 매달린다. 우리 사무소에 젊은 친구가 30명 정도 있는데 전부 다 약하다(웃음). 인생에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게 더 문제다. '내일은 나를 위해 빛나고 있다'는 마음가짐과 인생의 뚜렷한 목표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디어는 조그만 도전으로 쌓아가는 것"

일본 시코쿠(四國)의 섬 나오시마(直島)는 안도가 지휘한 대표적 프로젝트로 꼽힌다. 과거 산업폐기물 처리장이었던 나오시마는 1987년부터 미술관 등 각종 건축물을 지은 덕분에 지금은 한 해 30만명이 방문하는 문화와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했다. 안도는 나오시마 이외에도 도쿄·오사카 구도심의 외면받았던 건축물과 시설을 개조하는 작업도 여럿 맡았다.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인가.

"다들 그렇게 먼 곳에는 아무도 안 갈 것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엔 나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클라이언트였던 베네세그룹 회장은 '반드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겠다'고 했다. 그의 열정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버려진 섬을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분명히 말해 나오시마는 조건이 나쁜 곳이다. 건물이 여기저기 분산돼 있었고, 건축자재를 옮기기에도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창조는 역경 속에서 탄생한다."

―오사카, 도쿄, 서울 등 경기 침체로 대도시가 활기를 잃고 있고, 특히 빈집은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일본도 한국도 빈집이 잔뜩 생기고 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시 쓸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누가 이미 만든 것 안에 새로운 것을 만든다면 더 재밌는 결과물이 나온다.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들에게 처음부터 멋지고 큰일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유머, 의지와 열정을 지니고 살아갈 힘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도전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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