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의 열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월 14일(현지시간), 시애틀의 홈구장 T모바일 파크 한가운데 선수들이 모였다. 선수들 앞에는 시애틀 출신의 위대한 스타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켄 그리피 주니어, 에드가 마르티네스 등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맨 앞, 흰색 단상 앞에 여전히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선수가 마이크 앞에 섰다. 잠깐 모자를 벗었을 때 희끗희끗한 머리가 드러났다.

스즈키 이치로가 9월 14일(현지시간) 시애틀 T모바일 파크에서 열린 공식 은퇴식에서 연설문 낭독을 위해 단상에 오르면서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등번호는 18년 전과 마찬가지로 51번. 누구보다 철저한 준비와 관리로 50세까지 야구를 하겠다던 그도 세월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2001년 시애틀 입단 이후 모든 인터뷰에서 일본어 통역을 거쳤던 그는 마지막 인사만큼은 직접 적은 영어 원고를 읽었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시되는 타자 스즈키 이치로(46)의 은퇴식이었다.

이치로는 1995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스에서 데뷔했다. 2001년 메이저리그에 도전했고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우려와 기대가 교차했다. 일본 출신 야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뛴 적은 그 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스물일곱의 비쩍 마른 청년이었다. 도무지 150㎞짜리 강속구를 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선수는 모든 걱정과 의심을 날리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가 됐다. 이치로는 2001년 시애틀에서 데뷔해 242안타, 타율 0.350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함께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이후 2010년까지 해마다 올스타에 뽑혔고, 매년 타율 3할을 기록했다. 2004년에는 262안타를 때리면서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도 갈아치웠다.

완전히 다른 야구로 미국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2001년은 메이저리그 ‘약물의 시대’였다. 어마어마한 덩치의 선수들이 타구를 까마득히 날려 버리던 시절이었다. 강속구를 강하게 때리기 위해서는 커다란 덩치로 가만히 선 채 몸통의 강한 회전을 이용해 타구를 날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치로는 그 반대였다. 작은 체구로 힘을 모으기 위해 체중을 뒤에서 앞으로 이동하는 ‘진자타법’을 시도했다. 빠른 공은 물론 변화구에도 약점이 있을 거라고 여겨졌지만 탁월한 콘택트 능력으로 이를 넘어섰다. 메이저리그는 이치로의 타격을 보고 자신들의 타격이론을 수정했다.

메이저리그 데뷔한 시애틀서 은퇴식

이치로가 T모바일 파크 단상에 올라섰다. 매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똑같은 루틴을 반복했다. 다리를 풀고, 팔을 빙빙 돌리고, 팔꿈치 보호대를 만지고, 투수를 노려보는 동작이 매번 똑같았다. 팬들은 그 폼을 눈 감고도 따라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긴장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풀어진 표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단단한 입매로 투수를 노려보는 표정 역시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1만734타석 동안 한결같았다.

이날은 달랐다. 단상에 선 이치로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타석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이치로는 “고맙습니다. 조금 긴장되는군요”라고 말문을 연 뒤 “좋아요. 시작할게요”라고 영어로 말했다. 뒤를 돌아보고 선수단을 향해서는 “(디) 고든, (유세이) 기쿠치, 오늘은 울지마. 안 우는 거야”라고 말해 분위기를 잡았다. 이어 자신의 원고를 들고 또박또박 영어로 읽어나갔다. 팬들의 박수가 쏟아질 때, 이치로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시애틀 팬들을 향한 은퇴인사는 9월에 이뤄졌지만 이치로의 은퇴는 보다 일렀다. 이치로는 지난 3월 21일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전, 오클랜드와의 경기에서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4타석에 들어서 안타 없이 삼진 1개만 기록했다. 이 경기가 이치로가 프로야구선수로 뛴 마지막 경기가 됐다. 이치로는 은퇴를 발표했고, 경기가 끝난 뒤 무려 1시간20분이 넘는 긴 시간의 기자회견을 통해 오랜 선수생활을 정리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치로는 ‘은퇴 결정에 후회는 없냐’는 질문에 “이렇게 큰 박수를 보내준 팬들이 있는데 어떻게 후회를 할 수 있겠나”라면서 “물론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과를 내기 위해 차근차근 뭔가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치로는 젊은 세대를 향한 조언에 대한 질문에도 “꼭 야구가 될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자신의 열정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뭔가를 찾아냈으면 좋겠다”면서 “그 길에서 벽을 만나면, 그 벽을 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벽을 만날 때마다 포기한다. 부디 자신의 열정을 끌어낼 수 있는 뭔가를 찾기 바란다. 잘할 수 있는 뭔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 프로야구 시애틀의 스즈키 이치로가 지난 3월 2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19 메이저리그 오클랜드와의 경기 도중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한 타석을 위한 완벽한 준비’ 야구 철학

이치로에게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야구였다. 야구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고, 야구를 잘하기 위해 모든 준비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야구가 이치로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단 한 타석을 위한 완벽한 준비, 그게 이치로가 추구한 가치였다.

이치로는 은퇴 기자회견 때 ‘가장 자랑스런 순간’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을 목표로 해왔지만 지나고 보면 기록은 별거 아니다. 어차피 기록은 언젠가 깨지는 것 아닌가. MVP와 10번의 올스타 등도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이렇게 경기에 뛸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지난해(2018년) 5월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에도 계속해서 몸을 만들어왔고, 이렇게 경기에 뛸 수 있었다. 그건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3월 은퇴 뒤에도 이치로의 야구는 계속 이어졌다. 야구선수 이치로의 삶은 한 페이지를 끝냈지만, 야구인 이치로의 삶은 계속되는 중이다. 이치로는 여전히 시애틀 매리너스의 일원이다. 공식 직함은 구단 회장 특별보좌역이라는 다소 애매한 이름이지만 역할은 선수들의 인스트럭터에 가깝다. 여전히 등번호 51번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홈 경기 때마다 선수들과 함께 워밍업을 하고, 캐치볼을 한다. 야구에 대해 뭔가 물어보는 선수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이치로의 장기인 ‘경기를 향한 준비’에 대한 열정을 전수한다.

올 시즌에는 여기에 ‘특별한 일’이 하나 추가됐다. 이치로는 고교시절 강속구 투수였다. 메이저리그 우익수로 뛰면서 엄청난 송구를 선보인 게 자주였다. 온몸의 힘을 이용해 공을 던지는 것은 이치로의 타격 외 또 다른 장기였다. 이 능력을 시애틀 선수들을 위해 사용한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이치로가 또 다른 부분에서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 바로 배팅볼 투수다”라고 전했다.

배팅볼은 경기 전 타자들의 타격훈련을 위해 공을 던져주는 일이다. 아주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훈련에 도움이 되는 공’을 던진다면 효과가 커진다. 일본프로야구는 ‘배팅볼 전문투수’가 있지만 KBO리그에서는 구단 현장직원이나 코치들이 이 역할을 한다. 시애틀 외야수 미치 해니거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 선수가 직접 배팅볼을 던져준다구요. 완전 장난 아니죠”라고 전했다.

이치로는 배팅볼 역시 완벽함을 추구한다. 이치로는 지난 3월 은퇴 뒤 계속해서 선수들과 훈련을 함께하면서 돕는 인스트럭터 비슷한 역할을 해왔다. 선수들과 함께 움직이지만 등록선수도 아니고 코치도 아니기 때문에 리그 규정상 경기 중에 더그아웃에 함께 있을 수 없다. 이치로는 경기 동안 실내 타격연습장에서 배팅볼 투구 훈련을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치로는 언젠가 혹시 배팅볼 투수가 다치거나 피곤해서 자신에게 던져 달라는 요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미리 준비했고, 매일 하루 200개씩 공을 던졌다. 배팅볼이라고 그냥 배팅볼이 아니다. 외야수 오스틴 놀라는 “이치로는 투심, 커터, 포심, 커브, 슬라이더 등 모든 구종을 다 스트라이크로 던질 수 있다. ‘뭐 던져줘요’라고 부탁하면 완벽하게 그 공을 던져준다. 엄청난 훈련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홈경기가 없는 날도 쉬지 않는다.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트리플A 팀을 찾아가서 유망주들을 위해 배팅볼을 던져준다. 어린 선수들이 “너무 강해서 잘 못치겠다”고 하는 바람에 트리플A에서 던질 때는 조금 살살 던진다.

‘프로페셔널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팀을 위해 배팅볼 투수를 마다하지 않는 이치로가 은퇴식에서 자신의 영어 연설을 이어갔다. 시애틀 팬을 향해 “야구를 이토록 사랑하고, 존중해주시는 팬 여러분 앞에서 뛸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박수가 나왔고 이치로의 눈시울도 잠깐 붉어졌다. 이치로는 “팀 동료들 그리고 너무나 대단했던 상대팀 선수들, 이들과 함께 야구를 할 수 있어서 무척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는 더욱더 열심히 할 수 있었고, 더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동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이어 이치로가 이날 꼭 말하고 싶던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긴 시즌의 마지막날이 찾아오면 모든 선수들이 스스로 마음속에 되새겨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페셔널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이죠. 시즌 막판의 경기들은 시즌 초반의 경기들, 중반의 경기들과 모두 똑같이 중요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똑같은 열정으로 자기의 역할을 해나가야 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이 특별한 경기를 보러 온 팬들을 향해 여러분 선수들이 줄 수 있는 아주 위대한 선물입니다.”

마지막 무대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치로라는 선수의 존재 이유를 밝혔다. 재능과 열정, 이를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 이것은 프로선수의 특권이자 의무다.

<이용균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