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어느 대륙 어느 문명도 열등한 것은 없다

저자소개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누군가를 만나러 시내의 어수선한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그의 책상 위에 『슬픈 열대』가 놓여 있었다. 읽던 중일까? 이 책을? 이 두꺼운 책을 이 사람은 읽고 있던 중일까? 이런 호기심이 생겨서 그가 커피를 내온다고 탕비실로 갔을 때 건성으로 서문을 펼쳐보았다. 이 책은 따로 서문이 없고 1장으로 시작되지만, 바로 그 1장이 ‘나는 왜 이 책을 쓰는가’에 해당하는 실질적인 서문이다. 서문 중의 서문이라고 할 만한 1장을 한두 페이지 정도 눈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책 읽는 사람들의 버릇이다. 누군가의 연구실이나 서재를 찾아갔을 때 한순간에 그의 책장에 기립해 있는 책들과 책상에 놓여 있는 책들을 일별하면서, 아 이 사람은 요즘 이런 책을 읽는구나, 아니 이 양반 책들은 왜 이렇게 저자별로 출판사별로 장르별로 군 사열식하듯 꽂혀 있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인가, 뭐 이런 무모한 추측을 하는 것이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님을 광주발 용산착 심야 KTX에서 뵌 적이 있다.


대화 중에 김우창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 두 분의 관계는 여느 사제 관계를 뛰어넘는 인간적·학문적 우의로 두터운 관계다. 하루는 김종철 선생님이 스승의 댁으로 문안인사를 갔다고 한다. 정담 중에 김우창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고, 그 틈에 김종철 선생님은 책 읽는 사람의 버릇대로, 도대체 이 분은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으신 걸까, 하는 호기심으로 테이블 위의 몇 권을 들춰보았는데, 그리고 책장에서 아무렇게나 한두 권을 꺼내서 펼쳐보았는데, 그 많은 메모와 독서의 흔적이! 그런 기억을 살피시던 김종철 선생님이 이렇게 덧붙였다.


“이봐요. 정 선생. 우리 같은 사람들은 책을 사놓고 뭐 필요한 거 있나 목차나 서문 읽어보고 여기저기 쫌 훑어보다가 그냥 꽂아놓잖아요. 근데 그 양반은 다 읽은 거야. 그 많은 책을!”


나는 두 번 놀랐다. 김우창 선생님의 돈후한 지적 세계에 놀랐고, 한 세대나 어린 사람, 그것도 오랜 세월 생계형 필자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을 김종철 선생님이 허물없이 대해주시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문이나 쫌 읽어보고 꽂아놓잖소” 하는 그 격의 없음에 놀랐고, 또한 감사했다. 그 분께서 설마 그럴 리야! 




아까 그 책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 사람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슬픈 열대』의 서문, 즉 1장은 바로 이런 중후하면서도 기품 있는 얘기로, 따스하다. 저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08년 11월 28일에 태어나서 2009년 10월 30일에 타계했다. 한 세기를 넘게 산 거장이다. 그의 사상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어느 대륙의 어느 문명이든 우월하거나 열등한 문명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자연적·사회적·종교적 삶의 복잡한 과정에서 저마다의 지혜와 풍습과 사유를 발전·지속시켜 왔다는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적어도 상식 수준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이지만, 이를 그는 80여년 전에 주창하였고 또한 입증하였다. 


그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내륙 열대원시림 부족들, 그러니까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현지 조사·연구를 행하는 과정을 기록한 『슬픈 열대』다. 브라질의 열대에서 그는 서구문명이 얼마나 잔혹하게 그 나머지 대륙의 심장을 관통하였는가를 증언한다. 단순히 영토상의 식민지 문제만이 아니라 그 나름의 원칙과 관습으로 자족해온 하나의 문명을, 그 ‘야생의 사고’를 ‘문명’이라는 이름의 서구 방식으로 철저히 해부하고 유린하여 마침내 산산조각 내고는 그것을 유랑 관람으로 편재해버리는 처절한 현실을 진정으로 애통해한다. 


『슬픈 열대』의 본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문화의 무지개가 우리의 열광으로 파인 허공 속으로 빠져들기를 멈추었을 때, 즉 우리가 여기 있고 또 세계가 존재하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그 가느다란 아치는 우리 앞에 그래도 머무를 것이다. 그 아치는 우리의 노예상태의 길과는 반대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을 것이며,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을지라도 단지 그 길을 숙고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은총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도 이처럼 격조 있는 사유의 문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문은 말할 것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의 서문 격인 1장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스승 조르주 뒤마를 회상한다. ‘절대로 강의 준비를 해오는 법’이 없는 뒤마 선생은 ‘풍부한 표정이나 듣기 좋은 그 쉰 듯한 목소리’를 지닌 ‘굉장히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브라질 열대우림에 대한 학문적 가치와 인간적 연대의 길을 젊은 학자에게 일러준 스승이었다. 그는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설립에 헌신하였고 자신의 제자들, 특히 레비스트로스 같은 헌신적이고 명민한 학자들을 브라질로 보냈다. 


스승을 뛰어넘는 게 참된 제자의 길이라는 듯,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정부와 뒤마 교수 같은 사람들이 브라질의 교육사업에 기여하는 것이 또 다른 식민성의 연장이며 자신과 같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곳에 가는 것도 결국 브라질 상층부와의 교섭 및 브라질 신진 엘리트의 친프랑스화에 복무하게 되는 것임을, 바로 그 1장에 쓴다. 깊은 존경심을 담고서.


물론 서문 격인 1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문장이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고 그는 쓴다. 브라질을 떠나온 지 무려 15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책을 써볼 생각을 수없이 하였으나 그때마다 부끄러움과 혐오감이 앞서서’ 중단하기를 반복해온 터였다. 왜 그랬을까. 조금 더 읽어보자. 


“기억의 찌꺼기들, 예컨대 ‘오전 5시 30분, 우리는 이국의 열매를 팔기 위해 선체를 따라서 작은 선대를 이루며 몰려드는 상인들을 보면서 레시프항에 정박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추억들을 적어놓기 위해서 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책들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여행기, 탐험 보고서, 또는 사진첩의 형태로 된 아마존, 티베트, 아프리카 이야기들이 서점을 뒤덮고 있는데, 이 책들이 주로 인기만을 염두에 둔 채 쓰여지고 또 편집되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속에 담긴 증언의 가치를 식별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마치 요즘 우리 여행 풍속이나 독서 풍토에 일침을 놓는 듯하다. 대륙별로 나라별로 음식이며 문화유산이며 오지 체험이며 온갖 종류의 여행서들이 넘쳐난다. 그 중 어떤 책들은 정보의 측면에서나 일상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신선한 감각이나 남다른 생각의 편린들이 반짝 빛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했듯이 “여러 해에 걸친 각고 끝에 미지의 상태로 있던 사실들을 밝혀내는 게 아니라 먼 거리를 답파하여 사진 또는 영화를 되도록 천연색으로 끌어모아다가 며칠을 두고 연달아 청중을 끌어모아 강연만 하면 되는” 당시의 표피적이고 상업적인 일들이 21세기적 버전으로 넘쳐나는 작금의 풍속은, 어수선하고 더러 불편하다. ‘관광 포르노그래피’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행지들이 대상화되고 그 나라의 풍속이 구경거리가 된다. 그곳의 현실적 삶보다는 여행자의 스쳐지나가는 눈으로 채집하고 낭만적으로 편집하여 비현실적인 문장으로 버무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작해야 여행장비의 목록이나 선상船上에서 강아지들의 장난이라든가, 이미 반세기 동안이나 갖가지 여행기 속에서 전해오고 있는 일화 속의 낡은 정보 나부랭이들”뿐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비판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부주의한 방송과 불성실한 책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레비스트스는 이 책의 ‘1부’ 제목을 <여행의 마감>이라고 붙였다.

 



★ 이 글은 2017년 9월 19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