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5]
2003-03-07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아니메의 모차르트, 혹은 사람의 아들

<만화가의 길>

분명히 세상에는 천재가 있다. 살리에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모차르트가 있다. 데즈카 오사무보다 뛰어난 만화를 그린 만화가는 시라토 산페이나 쓰게 요시하루 등등 많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분명 데즈카의 작품들을 능가한다. 하지만 작품의 방대함과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데즈카에 필적할 인간은 없다.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면 모를까. 그렇다.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 만화의 신이다. 단순한 치사가 아니다. 데즈카 오사무가 죽었을 때 ‘데즈카 선생은 외계인이다. 어딘가 우주 저편에서 지구로 와서 사명을 다하고 돌아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데즈카 오사무는 전후 일본 만화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만화로 만들어냈다.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불새>를 비롯하여 SF <메트로폴리스>와 <우주소년 아톰>, 의학물 <블랙 잭>, 종교물 <붓다>, 정치물 <아돌프에게 고한다> 그리고 <리본의 기사> <밀림의 왕자 레오> <키리히토 찬가> 등 엄청나게 광범위한 소재와 주제를 작품에 담아냈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데즈카 오사무의 손에서 출발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서 데즈카 오사무는 세계 전체를 재창조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데즈카 오사무와 동등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데즈카 오사무는, 범인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타고난 천재일까? <만화가의 길>(황금가지 펴냄)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도 든다. 의사생활을 하면서 십여편 이상의 만화를 그리고, 그 와중에 1년에 365편이 넘는 영화를 보는 생활은 보통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데즈카가 다니던 의대 교수가 “이 상태로 의사 공부를 계속한다 해도 어차피 제대로 된 의사는 되지 못할걸세. 아마 환자 대여섯은 죽이고 말걸. 이 세상을 위해서라도 의사는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게나”라고 충고했어도, 듣지 않는다. 어머니의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거라”는 말을 듣고 만화가의 길로 정진하지만, 그러면서도 공부를 계속하여 의사 면허를 딴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가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과거지사를 들어보면, 천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재능 이상으로 역시 ‘꿈과 노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즈카는 2차대전 당시 청소년기를 보냈다. 만화에 미쳐 있던 데즈카 오사무는 폭탄이 떨어지는 군수공장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만화를 그렸다. 단지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매일 아침 화장실 안쪽 벽에 만화를 붙였다. 쭈그리고 앉으면 누구나 볼 수밖에 없는 정면의 벽에. 그렇게 날마다 만화를 그리고, 의대에 가서도 변함없이 만화를 그렸다.

데즈카 오사무 지음 | 김미영 옮김 | 황금가지 펴냄

데즈카 오사무가 그린 만화의 영역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극렬한 호기심으로 얻은 지식들을 자신의 작품에 투여했다. 영화적 기법을 만화에 도입하여 스토리 만화의 기틀을 잡았고, 소재와 주제를 바꿔가면서 독자를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데즈카 오사무는 엄청난 일중독자였다. 한때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일어났을 때, 데즈카 오사무가 처음으로 한 말은 “제발 부탁이니까 일을 하게 해줘”였다.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의 주장과 논점이 명확했다. 영화에서 펠리니는 좋아하지만 고다르는 평론가와 마니아나 좋아할 감독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몇 작품을 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내용이 무의미하고 안이하다”고 비판한다. 좋다. 만화의 신인 데즈카는 그럴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신랄한 비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데즈카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을 다듬었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 데즈카의 작품을 읽고 자란 사이토 다카오, 다쓰미 요시히로 등이 만화가로 데뷔하여 ‘극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만화를 만들어내며 성인 독자가 증가하던 시기가 있었다. 질투심과 함께 매너리즘이라는 독자의 비판을 받은 데즈카는 노이로제가 심해져 계단에서 구르기도 하고, 마침내 의학도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라에 있는 은사를 찾아가 공부를 하며 학위까지 받는다.

한 편집자는 높이 쌓인 만화잡지를 엄청난 속도로 넘기며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을 검토하던 데즈카의 모습을 전해준다. 데즈카 오사무는 언제나 맹렬하게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쏟아냈던 작가였다. 일본 만화의 신은, 신의 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데즈카는 언제나 자신을 의심하고, 타고난 호기심과 노력으로 신천지를 만들어낸 위대한 인간의 자식이었다. 데즈카 오사무가 걸었던 <만화가의 길>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인간 데즈카의 땀냄새와 일상의 유머가 가득 배어 있기 때문이다.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데즈카가 더 궁금하다면

<만화가의 길>은 에세이풍으로 듬성듬성 쓴 자서전이다. 유머가 풍부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들어 있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성장과정 등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보완을 원한다면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데즈카 오사무 지음/ 누림 펴냄)를 보면 좋다. 86년부터 88년까지 데즈카가 했던 강연과 각종 기록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중학생 시절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대부의 아들>도 전편이 담겨있는데, 이지메당하던 데즈카가 만화를 통해 마음의 교류를 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역할을 알고 싶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을 정리한 책 <일본의 아니메>(日本のアニメ/준비위원회 지음/ 보도사 펴냄)의 7장 ‘데즈카 오사무-국산 30분 텔레비전 아니메의 시조 데즈카 오사무. 그 거대한 발걸음’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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