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 로즈 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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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7.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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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 ~ 1917)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고 하급관리였던 아버지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년 ~ 1917년)


어린 시절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로댕은 14세에 국립 공예 실기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우연찮게 점토(찰흙)를 만지게 되면서 조각가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18세에 미술대학 입학에는 실패하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낮에는 갖가지 부업을 하면서 야간에는 조각에 몰두하며 지낸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재위 1852 ~ 1871)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파리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던 시기였고, 그 결과 지금 방사형 모양의 파리 모습을 갖추게 된다.

나폴레옹 3세와 파리의 재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실내 장식업, 건축 관련 조수 역할을 하던 로댕에게는 이 당시 경험들이 향후 조각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댕은 24에 프랑스의 조각가 에메 쥘 달루 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반려자로즈 뵈레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1년 후 첫 아들 오귀스트를 낳았다.

에메 쥘 달루 '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부르보네 여자'


로댕이 이 시기에 만든 미뇽이란 작품이 바로 로즈 뵈레를 모델로 한 것이다.

밤마다 자신의 조각 작품 제작에 몰두하던 로댕은 1864 코가 부러진 사나이라는 작품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다.

당시 조각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적인 조각의 완벽한 황금 비율이라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던 심사위원들에게 일상에서 볼 수 있던 실제 사람의 모습을 생생하게 사실적인 묘사로 표현한 이 작품이 달갑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당연히 이 작품은 살롱에서 낙선을 하게 된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 ~ 1883)1863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당대 관람자들과 비평가들을 분노케 하며 혹평을 받았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식사', 1863년


하지만 오늘 날 풀밭 위의 점심 식사모더니즘, 근대 미술의 출발을 알린 혁신적인 작품으로 간주 되듯이, ‘코가 부러진 사나이역시 근대 조각으로 가는 포문을 연 작품이라고 평가 받을 만하다.  

1870, 30살이 되던 해 로댕은 벨기에의 브뤼셀로 떠난다.
브뤼셀에서 7년간 건축장식 직공으로 일하면서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여행을 통해 예술에 대한 견문을 더욱 넓힐 수가 있었다.

특히 1875년 이탈리아 여행은 이후 로댕의 예술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도나텔로 '다윗', 1425 ~ 1430년 / '막달라 마리아', 1453년 ~ 1455년


이탈리아에서 도나텔로(Donatello, 1836 ~ 1466, 마사초가 회화에서 이룩한 르네상스의 업적을 조각에서 이룬 예술가. 대표작 다윗’)미켈란젤로(Michellangello, 1475 ~ 1564, 신성한 사람, 대표작 피에타’, ‘시스티나 대성당’)의 걸작들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미켈란젤로묶인 노예상로댕의 출세작 청동시대’(The Age of Bronze)에 영감을 주었다.

미켈란젤로 '묶인 노예상', 16세기 경


청동시대작품도 고전 조각의 이상적인 비율이 아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인 몸을 사실적 표현하여 완성한 걸작이다.

1880 이 작품은 재인식되어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국가에서 매입하였다. 이때부터 로댕은 조각가로서의 최고의권위를 누리게 된다.


이와 동시에 로댕은 미술국 차관 체르케로부터 장식 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 받았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공격으로 초토화된 파리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조각 최고의 권위자가 된 로댕에게 그 기회가 오게 된 것이었다.

로댕은 장식 미술관을 위한 대작의 모티프를 단테신곡 지옥편에서 얻은 영감에 두고 대작 지옥의 문제작에 착수한다.

로댕 '지옥의 문'


결론부터 말하면 로댕은 이후 37년간 지옥의 문을 계속해서 만들었고, 결국 지옥의 문은 미완성 상태로 남겨진 채 로댕은 끝내 사망을 하게 된다.

사실 로댕이 남은 생을 지옥의 문을 만드는데 몰두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 여행 당시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 동쪽에 설치된 기베르티의 제3청동 대문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베르티 '천국의 문' / '제3 청동대문'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공화국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 ~ 1455)는 두 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구약성서 이야기를 부조로 나타냈는데, 문을 만드는데 21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이 청동 대문은 조각을 회화하였다비난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라고 말한 이후 지금까지 이 작품은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으로 불리고 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만드는 가운데 작품 안에 있는 각각의 조각 상들을 여러 개씩 만들어서 판매를 하는데, 그 작품들이 생각하는 사람’, ‘키스등 우리가 너무 알고 있는 바로 그 걸작들이다.

로뎅은 로즈 뵈레와 평생 동거만 했는데, 유산 상속을 위해 그녀와 결혼을 하지만, 결혼을 한 1917, 로즈 뵈레가 먼저 사망하고 곧 이어 로댕도 사망하고 만다.

엔지니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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