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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머리:의료용 거머리 (L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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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 1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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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났으니 말이지 정분(情分)치고 우리 것 만치 찰떡처럼 끈끈한 놈은 다 없으리라. 미우면 미울수록 싸울수록 잠시를 떨어지기가 아깝도록 정이 착착 붙는다. 부부의 정이란 이런 건지 모르나 하여튼 영문 모를 찰거머리 정이다.” 김유정(金裕貞)의 ‘아내’에 나오는 글 한 토막이다. 애증일로(愛憎一路)라! 사랑하므로 미워하노라! 부부란 예나 지금이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토닥거리면서도 살갑게 살아간다. 암튼 자주 다투면서 산 부부가 되레 오래 산다고 하더라.

 

 

끈덕지게 착착 붙는 거머리

그런데 지긋지긋 끈덕지게 ‘찰거머리처럼’ 착착 달라붙어 사람을 괴롭게 굴 때 ‘거머리 같은 놈’이라고 하는데 요샛말로 진절머리 난다는 스토커(stalker)라거나 할까. 그건 그렇다 치고, 거머리(leech)는 지렁이나 갯지렁이와 함께 몸에 고리(環)를 많이 가졌다하여 환형동물(環形動物, Annelid)에 넣는다.

 

거머리 무리는 우리나라에는 2 과(科) 15종이, 세계적으로는 500여종이 있다하고 종이 서로 달라도 체절(몸마디)은 모두가 34개이며, 특별나게 딴 환형동물에는 없는 5~8쌍의 눈(안점)이 있고, 빨판도 둘로 입 빨판(oral sucker)과 이것보다 더 큰 뒤 빨판(posterior suckers)이 있다. 앞의 것은 피를 빨거나 먹이를 잡는 데 쓰고, 뒤의 것은 숙주에 달라붙거나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의 것이 보통 2 cm 쯤 되는 데 반해 칠레 남쪽의 거머리 한 종(Americobdella leech)은 몸 길이가 놀랍게도 26 cm나 되며 지렁이를 통째로 먹어치운다고 한다.


 

 

거머리도 모두 피를 빠는 것은 아니다 

거머리에는 앞 빨판(3가닥이 남)에 100여 개의 아주 작은 예리한 이빨이 나 있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같은 척추동물의 피를 빪으로 살아가는 녀석들, 이가 없어서 지렁이, 달팽이, 곤충의 유충, 갑각류 같은 무척추동물을 잡아먹는 것들, 생물체가 아닌 유기물부스러기를 먹는 것 등 3부류가 있다. 그리고 거머리는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강이나 연못, 늪지대 등 민물에 사는 것, 땅바닥이나 열대지방에서는 나무 위에 있는 놈, 바다에 서식하는 무리가 있으며, 다른 생물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잠자리나 가재, 물고기, 개구리, 남생이들의 먹이가 된다는 점에서 생물생태계에 중요하다하겠다. 만물은 다 먹이사슬에서 제 자리(位)가 있고 그래서 세상에 하찮은 생명이 없다하지 않는가.

 

 

거머리는 자웅동체지만 반드시 짝짓기를 한다


거머리는 자웅동체(난소와 정소를 다 가짐)이지만 지렁이나 다른 하등동물처럼 반드시 짝짓기 하여 정자를 맞교환한다. 머리와 꼬리를 반대로 하고 서로 달라붙어서 정자가 든 주머니 정포(精包,spermatophore)를 상대의 환대(環帶,clitellum) 아래에 집어넣어준다. 환대(고리 띠)는 성적으로 성숙할 때 생기는 생식기관으로 지렁이와 마찬가지로 수정란을 둘러싸는 고치(cocoon)를 만들며 얼마 후에 거기서 새끼가 나온다(알을 60~500개 낳음). 정말이지 근친교배가 해롭다는 것을 동식물들에서 배워 ‘우생학(優生學)’을 논하게 되었으니, 식물의 양성화(兩性花)에서도 제 수술의 꽃가루가 제 암술에 수분(受粉,꽃가루받이)하여도 수정(受精,정받이)이 되지 않으니 이를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self-incompatibility)’이라 하지 않는가. 거참, 지렁이나 거머리, 꽃 따위가 뭘 안다고….

 

 

살에 붙은 거머리는 마구잡이로 떼지 말 것

필자는 지리산 자락(경남, 산청)에서 자란 깡 촌놈이라 벼논도 많이 맸었다. 정신 없이 어른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질퍽한 논바닥을 건성으로 훑고 있는데 갑자기 장딴지가 근질근질해온다. 만지는 순간 손끝에 덜컥 느껴오는 미끈한 그 무엇(?)에 등골이 오싹 한 것이 섬뜩하다. 아! 거머리로구나, 번번이 당해 본 까닭에 단방 알아차린다. 요새사람들이 그랬다면 아마도 놀라 해장작을 팼을 것이다.

 

오늘 또 재수 옴 올랐다는 생각으로 논두렁으로 나가 의연함을 잃지 않고 풀 한 줌 뜯어 종아리의 흙탕물을 쓱 문질러 닦고, 조심스럽게 홱! 이미 배가 불룩한 놈을 부여잡는다. 요놈을 그냥 둘 수 없다, 원한의 복수를 해야지. 대로(大怒)한 난 다짜고짜로 짱돌벼락을 주지만 악동(惡童)의 장난기가 동하는 날엔 기어이 뾰족한 나무꼬챙이로 똥구멍을 찔려 양달에 세운다. 가뜩이나 풀뿌리나무껍질 먹고 만든 아까운 내 적혈구를 축낸 네놈은 대가를 오롯이 치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때는 서툴러 그랬지, 윽박질러 당장 떼면 악바리들이 깨물고 있던 살점이 뜯겨져 상처가 커지고 피를 더 본다. 그러므로 손가락으로 슬금슬금 입 빨판 근방을 쓰다듬어 주다가 떼는 것이 옳다. 아니면 라이터나 담뱃불로 지지거나 소금, 비눗물, 식초 등을 붓는 방법이 있다. 

 

 

거머리의 침에는 피를 굳지 않게 하는 물질이 있다

입(턱)으로 빤 피는 인두, 식도, 소낭(嗉囊, crop, 새의 ‘모이주머니’에 해당함)로 내려가서 거기에 일단 피를 저장, 소화시킨다. 그런데 소낭은 신축성이 있어서 질탕하게 양껏 먹으면 자기 몸의 5배까지 늘어나며 거기에 든 피는 오래오래 머물지만 함께 있는 공생세균(共生細菌) 탓에 썩지 않는다하며, 1년에 한 두어 번 한껏 먹으면 끄떡 없다 한다.


아직도 내 다리엔 피가 콸콸, 유혈이 낭자하다. 거머리에 물린 자국에서는 피가 한참동안 멎지 않고 흐르니 거머리가 묻혀둔 피를 굳게 하는 물질이 시나브로 씻겨나가야 끝장난다. 거머리 침샘에는 피의 응고를 막는 항응고효소(anticlotting enzyme)와 마취제(anesthetic), 피를 많이 흐르게 혈관확장물질(vasodilator)가 있어, 이것들을 혈관에 집어넣으니 피가 응집하지 않고 거머리 목으로 술술 넘어가며, 거머리가 문다는 것을 못 느낄뿐더러 깨문 자리가 발그레하게 붓는다.


거머리의 침샘에 든 히루딘(hirudin)은 오래 전부터 항응고물질(anticoagulants)인 헤파린(heparin)과 함께 피가 응고하여 혈관을 틀어막는 혈전증의 예방 및 치료에 써왔다. 1976년경에 히루딘의 화학구조가 밝혀졌으며 지금은 여러 제약사에서 유전자재조합으로 대량생산하며, 천연히루딘은 고작 65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혈액응고에 중요한 몫을 하는 트롬빈(thrombin)의 활동을 억제한다.

 

 

의학에도 이용되는 거머리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는 “의술(의학)은 치료하고 자연은 치유한다.(Medicus curat, natura sanat: Medicine cures, nature heals)”고 했다. 병을 다스리는 이 ‘자연’에는 푸나무나 세균, 곰팡이 같은 미생물에다 거머리도 든다. 거머리요법은 2,500년 전부터 정신질환·피부병·통풍 등의 치료에 써왔으며, 특히 정맥이 충혈 되는 증세인 울혈(鬱血)에 의학용거머리에게 피를 빨렸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이후에 비로소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으니, 성형수술·재건수술·손발가락접합수술들을 정교하게 해도 정맥이 끊겨있어 피가 제대로 돌지 않고 고여 퉁퉁 붓고 조직이 상하기 일쑤다. 여기에 거머리를 갖다 대면 악돌이는 눈에 불을 켜고 쏜살같이 단번에 달려들어 배가 빵빵할 때까지 피를 빨아댈 뿐더러 침샘의 히루딘도 상처부위에 들어가 혈액응고를 막으니 일석이조의 치료법이다. 이 치료에 국산보다 족히 서너 배나 되는 8~9㎝나 되는 영국산(産) 거머리(Hirudo medicinalis)을 쓰는데 한 마리당 가격은 25,000원선이라 하며 수입업체는 피에 굶주린 거머리를 ‘퀵 서비스’로 배달한다고 한다. 영국이나 러시아에서 토끼고기나 소피(blood of bovine)를 먹여 사육한다고 하는데 거머리가 이렇게 돈 될 줄이야 누가 알았나.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거머리 채집을 했을까? 그렇다, 영명하게도 녀석들은 무논에서 일하느라 철벙철벙 물장구에서 생기는 물결(水波)을 느끼고 오니 이를 ‘양성주파성(陽性走波性)’이라 한다. 그러니 물에 들어갈 필요 없이 바깥에 퍼질러 앉아 장대로 찰싹찰싹 물 등짝만 두들기면 된다. 얇은 풀 이파리 같이 납작한 놈이 할랑할랑 물살을 가르며 스치듯 떠오는 것(파상운동)을 보면 귀엽고 예쁘다. 몸을 쓰지 말고 머리를 쓰라 한다.

 

 

거머리도 턱 없이 줄었다 

이 글을 적다 보니 45년이 더 지난 옛날 수도여고에서 교편 잡을 때 일이 새록새록 난다. 봄 학기 때면 걸스카우트 학생들이 신다 해어진 나일론스타킹을 열심히 모았으니, 그것이 농촌으로 가서 거머리 예방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샌 제초제가 있어 논매기를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지, 제초제나 농약 등살에 기어이 거머리도 턱없이 줄었다고 한다. 알량한 우리네 인간들의 탐욕 탓에 애꿎은 동식물만 죽을 맛이다.

 

 

 

권오길 / 강원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생물의 죽살이], [꿈꾸는 달팽이], [인체 기행] 등이 있다. 한국 간행물 윤리상 저작상(2002), 대학민국 과학 문화상(2008)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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