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욕망이 만들어낸 팜므파탈, 그 치명적인 유혹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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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1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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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욕망이 만들어낸 팜므파탈, 그 치명적인 유혹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중세의 이브,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 트로이전쟁을 일으킨 헬레네,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딧세우스를 유혹하는 키르케, 다윗왕이 빠져버린 밧세바, 가슴에 독사를 얹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삼손의 머리칼을 자르는 데릴라, 현대에 와서는 롤리타와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 까지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대자대비한 성모와는 정반대로, 치명적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요부, ‘팜므 파탈’이라는 점. 수백년간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위험한 여인들은 잔혹하지만 신비하고 음탕하지만 매혹적이다.

 

우리는 마릴린 먼로라는 배우를 잘 알고 있다. 과연 우리들은 그녀의 일에 대해서 속속들이 모르는 바가 없다. 그녀의 몸매는 38 - 25 - 38, 그녀가 잠잘 때 입는 옷은 샤넬 넘버 5, 공식적으로  3번 결혼했고, 그 중 한 번은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 타자. 조 디마지오였고, 그와 이혼한 뒤에는 아서 밀러와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한다. 우리는 해변에 서서 농염한 미소와 몸매를 드러낸 채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는 마릴린 먼로에게 현혹당한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직접 구분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그녀의 이미지는 모두 그녀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것들이다. 마릴린 먼로.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제거하거나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쌓아올렸고, 그렇게 스스로를 파괴해 버렸다.

지옥에서 태어난 천국의 육체

1926년 노마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할리우드의 필름편집자이던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낳기 전에 이미 남자로부터 버림받았고, 어린 딸은 어머니에게 드나드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마릴린 먼로의 외증조부는 팔순의 나이에 자살했고, 그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쳤다.

 

노마진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녀를 맡았던 법적인 후견인 양부모는 동부로 떠나면서 합법적으로 그녀를 처분하기 위해 결혼시킬 때까지 마릴린 먼로는 10여 개의 보육원과 2년의 고아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16세였다. 결혼 아니면 고아원행이었다. 그녀의 양어머니 그레이스가 나서서 적당한 신랑감을 찾았고, 그 결과 짐 도허티라는 21살의 남자가 남편으로 선택되었다. 결혼식장에서 수줍어 하며 노마진이 양어머니에게 물었다. "섹스는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을까요?" 이때 그녀의 양어머니는 "어차피 곧 배우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노마진은 금방 배웠고, 아내와 주부로서의 생활에도 익숙해졌지만 남편이 부인의 핀업 사진을 들고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군으로 떠나고, 그녀는 낙하산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1944년 그녀는 군수품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내세운 선전 사진에 나가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전문적인 사진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진작가 앙드레 드 디앙과 바람을 피웠고, 그의 조수인 윌리엄 번사이드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때 그녀는 대륙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레일러 기사들을 위한 달력의 누드 사진 모델이 되었다. 한편 종전후 귀국한 남편은 평범한 아내와 아이들을 원했으므로 노마진과 이혼했다.

노마진이 마릴린 먼로란 이름을 사용하고, 머리칼을 금발로 물들인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릴린은 일당 5달러짜리 모델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진짜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 쪽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할리우드에는 자신의 몸을 무기로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수없이 많은 소녀들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드 모델 출신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사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연예 매니지먼트사의 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스타가 아니었다.

먼로는 60세의 아버지 같은 영화제작자 조 솅크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와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자신보다 열살 연상의 프레드 카거를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매우 행복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폭스는 마릴린 먼로의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먼로를 해고했다. 폭스사에서 해고된 뒤 컬럼비아로 영화사를 옮긴 마릴린 먼로는 이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한순간에 다시 맨 밑으로 떨어져 버린 마릴린 먼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심장병을 앓고 있던 늙은 에이전트 자니 하이드였다. 자니 하이드는 마릴린 먼로보다 30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금발 미녀를 얻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렸고, 20세기 폭스사에서 그녀와 다시 계약을 맺도록 힘써주었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를 위해 헤어드레서와 연기코치를 배정해주었다. 그러나 먼로는 영화 배우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으므로 하이드의 청혼을 거절했다.

 마릴린 먼로에게 성공은 일순간에 찾아왔다. 1950년에 그녀는 <아스팔트 정글>이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조역을 맡으며 호평을 얻었고, <이브에 관한 모든 것>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마릴린 먼로에게 호응하기 시작하자 제작자들은 그녀의 매력이 관능적 백치미에 있다고 판단하여 이후 일련의 영화들에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관능적인 백치미를 한층 더 부각시켜 나갔다. <나이애가라>(1953)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 등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스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1952년 그녀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장애물이 출현했다. 그녀가 아직 무명이던 시절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촬영했던 누드 사진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여배우의 스캔들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는 자신이 유명해진 뒤 누드 사진을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자, 오히려 자신이 직접 사진을 공개해버렸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자 성공신화에 목말라했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성공을 위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관대했다. 그녀는 "전당포에 맡긴 차를 되찾기 위해 50달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포장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에게 대중과 언론이 던져준 면죄부는 그녀가 청순미를 과시하는 배우가 아니라 섹스 어필 하는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이 논란은 결과적으로 마릴린 먼로를 스타덤으로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되었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휴 헤프너가 창간한 <플레이보이>는 창간호 커버에 먼로의 지나간 누드 사진을 게재했다.

1954년에 이르자 그녀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섹스 심볼로서의 역할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마릴린 먼로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심각한 것이었다. 대중은 불꺼진 극장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열광하면서도 대낮에 거리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창녀'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마릴린 먼로는 마르셀 프루스트나 에머슨 등 당대의 고전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지성 콤플렉스를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이 소유권의 51%를 갖는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설립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때 짖궂은 기자가 철자가 어떻게 되는 지를 묻자 "내가 말하는 이름의 철자는 하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마릴린 먼로

먼로를 모르는 남자는 있어도 먼로를 꿈꿔보지 않은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프랭크 시나트라, 이브 몽땅, 케네디 형제 등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가 치른 3번의 결혼 중 가장 요란했던 것은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였고, 그 정점에 섰을 때 과감히 은퇴한 그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보고 그녀를 만나

보고 싶어했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 스타간의 화려한 만남을 보고 싶었던 대중의 욕구는 언론을 움직였고, 영화 제작사도 이벤트를 원했다. 그러나 마릴린 먼로는 스포츠를 몰랐고, 디마지오는 영화를 끔찍하게 지겨워 했다. 더군다나 디마지오는 매우 엄격한 이탈리아 이민가정 출신으로 가정에 헌신적인 배우자를 원했다. 이 두사람의 만남이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뉴욕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바람에 올라가는 유명한 장면. 촬영장에서 군중은 먼로의 치맛자락이 올라갈 때마다 환호를 질렀고, 급기야 자존심 강한 이탈리아 남자 조 디마지오가 마릴린 먼로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마릴린 먼로는 다음날 시퍼런 멍자국을 숨기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또한 이들 부부는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마릴린 먼로는 10대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로 자궁이 엉망이 되었고, 몇 차례의 임신도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릴린 먼로가 마약과 약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사랑했으나 먼로는 한 사람의 아내일 수 없었고, 남편일지라도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온전히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훗 날 재혼을 약속하지만 두 번째 결혼을 불과 3일 앞두고 마릴린 먼로는 치사량의 약물 복용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녀의 장례를 준비한 것은 조 디마지오였다. 이후 몇 년 동안 무덤 앞에 매일 장미꽃을 가져다 놓은 것도 그였다.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결혼하며 부부관계라기 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운 관계이긴 했으나 그녀의 공식적인 관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결혼생활(3년 반)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프랭크 시내트라, 이브 몽땅과 염문을 뿌렸고, 곧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남자가 바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였다. 훗날 먼로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군인이에요. 나의 최고 상관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있는 남자지요. 군인의 첫 번째 임무는 사령관에게 복종하는 것이잖아요. 나는 그 남자를 절대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자신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 그 유명한 노래 <Mr. President>를 불러준 이 금발 미녀를 지겨워 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국 대통령 형제에 의해 씹다 버린 풍선껌처럼 버려졌고, 곧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구소련의 한 신문은 "미국 문화를 생각할 때 뭐니 뭐니 해도 풍선껌과 마릴린 먼로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풍선껌에 비유된 마릴린 먼로. 벗겨서 씹다가, 단물 빨아먹고, 실컷 가지고 놀다가 뱉아 버리는 그 풍선껌. 세 차례의 공식 혼인 관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누드 사진 작가, 음악감독, 후견인, 잡지 기자, 햇병아리 배우, 음성 코치, 동업자, 그리고 말년에는 자신을 태우고 온 택시기사, 식당 종업원 등의 즉흥적인 섹스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의 일생을 고백했다.

누구 먼로를 죽였나

1962년 8월 5일 전세계 남성들은 울었다. 육감적인 몸매와 대담한 노출로 할리우드 최고 섹스심벌을 자랑하던 배우 마릴린 먼로가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마릴린 먼로는 캘리포니아 브렌트우드 자택에서 알몸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현장에는 빈 약병이 뒹굴고 있었고 그녀는 침대 위에서 전화 수화기를 꼭 쥐고 엎드려 있었다. 경찰은 약물 과다 복용에 의한 자살로 단정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우선 그녀의 혈액에서는 다량의 수면제 성분이 발견되었지만 그녀의 위장에서는 수면제와 관련된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고, 만약 그녀가 수면제를 주사로 투입했다면 당연히 있을 법한 주사기 바늘이 나오지 않았다. 또 대개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기 때문에 구토를 하게 되는데 그녀는 침대 위에 일자로 드러누운채 죽어 있었고, 구토의 흔적도 없었다. 그녀가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북돋는 정황들은 그외에도 케네디 형제와의 성관계 문제였다. 존 F. 케네디에서 로버트 케네디로 이어지는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더욱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적극적인 마릴린 먼로가 부담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개인전화번호를 바꾸었고, 그의 비서는 마릴린 먼로의 전화 연결을 거절했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자신의 친구에게 "만약 그가 계속 나를 피한다면 나는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몰라." 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로버트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어떤 책임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이런 정황들은 그녀가 살해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현장을 최초로 목격했던 경찰관의 의견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누군가에 의해 주사를 투여 받고 살해되었을 가망성이 크다고 한다. 또한 마릴린 먼로의 진단서에 서명을 했던 검시관은 그녀의 부검 원본 파일이 사라졌으며, 자살을 의미하지 않는 마릴린 먼로의 생전 마지막 메모와 그녀의 사건에 관한 첫 번째 경찰 보고서 또한 사라졌다고 말했다.

선주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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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저곳(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에서 가져온 모음들입니다. 딸들과 저의 친구들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