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의 이해2 : 축조방법+시설+발전+특징

프로필

2018. 9. 11. 9:00

이웃추가

안녕하세요!! 친절한 선배 입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성곽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발행처 /  문화재청 (성곽연구회)
발행일 / 2007년 12월


1. 축조방법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입지조건, 군민의 수에 따른 산성의 규모,주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축성재료, 재료 운송 수단, 축성 지휘 감독 관리 주체의 선정, 축성에 동원될 노동력 확보와 소요 식량 및 기간 등이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성곽의 축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벽을 쌓는 기술에 있었는데, 성벽을 축조히는 첫 번째 단계는 기초(城基)를 만드는 일이다.기초는 지표면의 부식토를 생토층까지 파내고 일정힌 너비를 잡아 펑탄히 하거나, 그 평탄한 면에 성벽 방향을 따라 흠을 파서 성벽이 밖으로 밀리는 현상을 방지히였다. 이때 기초와 체성(體城)이 견고해지도록 기초 위에 점토를 사용히기도 하며 석축으로 기단부를 구성히기도 하였고,경사면을 이룬 기초의 바깥쪽에 별도의 보축(補築)을 마련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초가 준비되면 성벽의 벽체를 쌓았다. 

벽체는 토성의 경우 산 경사면을 'L'자에 가깝게 삭토(削士)하여 바깥쪽은 높고 안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벽면을 구성하는 삭토법
단순히 획정된 기초의 내외면을 지형으로 파내어 흙을 성토(盛土)하여 성체를 구축히는 성토법 그리고 나무기둥을 세워 구획하고 서로 다른 종류의 흙을 교대로 다져 넣는 다져 판축법(版築法)등을 사용하였다. 또 판축처럼 거푸집을 만들어 칸막이를 세우고 흙을 채워 다지는 벽보(壁堡)의 방법도 이용되었다. 삭토법은 공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성토법은 우리나라 고대의 성곽 축조에서 가장 보편적인 빙법으로 평지토성이나 태뫼식 산성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22p

석축 성곽의 경우 협축(夾築)과 내탁(內托)의 방법으로 나뉜다. 협축은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이 내외협축이라고도 한다. 성벽을 쌓는데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일단 축조하면 매우 견고하였으므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내탁은 성벽 바깥쪽을 돌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리면서 인쪽 으로는 차츰 작은 돌과 부스러기로 채우고 가장 안쪽에 흙을 넣어 다지는 벙법으로 외축내탁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많은 우리나라는 지형상 경시가 가파른 부분에는 내린을 ‘평지나 능선 안부(鞍部)이 협축을 많이 시-용히였다. 내탁은 공역(工役)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정점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백제시대 석축 산성의 대부분이 이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석축성벽의 축조 방법은 삼국시대부터 사용 되었는데조선시대가 되면 평지에 조성 됨에도 불구히고 읍성의 대부분이 내탁의 벙법으로 축조되고 있어 전통적으로 내턱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시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곽은 성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여러 시설을 포함한다. 주요 시설물로는 성벽과 성황(城隍),성문,여장,(女墻).옹성(甕城), 곡성(曲),적대(敵臺),치성(雉),암문(暗門), 수구문(水l口門)등이 있다.
성황은 해자(垓字) 또는 참호(塹戶), 구(構)라고도 히는데 성벽 밖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하천이나 인공적으로 판 도랑으로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는 것을 해자나 호(濠)랴 하고 물 이 마른 도랑을 황(隍)이라 한다. 판축 토성의 경우 성벽 기초의 내외를 파내는 구조상의 특정으로 내황과 외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 시설을 통해 적의 침입시 성의 방어력을 높였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24p

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평상시 출입은 물론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 지는곳이다. 구조상 취약하기 때문에 이른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누다락문인 현문식(懸門式)의 구조가 발달하기도 하였으며, 성문을 보완하기 위한 옹성 ·적대 등을 시설히-였다. 옹성은 성문의 바깥쪽 앞을 돌려 막아 성문을 방어하는 시설로 삼국시대부터 축조되었다. 그 형태에 따라 만원형 방형 등으로 나뉘고 출입구의 위치에 따라 편문형 중앙문형으로 구별된다. 적대는 성문 좌우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구조플로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형의 시설을 말한다.

옹성과 적대가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는 시설이라면, 치성은 성벽의 방어를 견고히 하는 시설이다. 즉 방어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 뿐만 아니라 측면에서도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이 치성 위에 누각을 설치하였는데 포루(鋪樓) 적루(敵樓), 포사(鋪)라고 하였고 포(砲)를 설치하여 포루 ·석루라 불렀다.

한편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에 치를 설치하고 누각을 세우면 성우 (城隅) ·궁우(宮隅)·각루(角樓)라 하였다. 또 치성이나 곡성에 적이 접근히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성벽에서 아래가 내려다 보이도록 성벽 맨 윗부분에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얹은 미석(眉石)에 구멍을 뚫은 현안(懸眼)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여장은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으로 적의 회살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한 방어시설로서 여담,여첩(女堞),여원(女垣),타(垜),
성가퀴, 살받이터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체성에 여장을 시설하는 것이 정해져 에외없이 설치되었으며, 여장의 수와 합하여입보하는 인정(人丁)의 수를 빚추도록 하였다. 형태에 따라 평여장(平女), 철형여장(凸形),원여장(圓)이 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통로로서 평상시에는 막아 두었다가 적을 비밀리에 요격하거나 습격할 때 사용히는 시설이다. 이 밖에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세운 망루와 장대(將臺)보다 높은 곳에서 활을 쏘기 위한 노대(弩臺) 공격과 감시를 위해 속을 비우고 높이 쌓은 공심돈(空心墩) 봉화를 피우기 위한 봉돈(烽墩) 등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곽의 대부분이 산성인 우리나라는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한 우물과 집수정 등 치수와 관련된 시설이 성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산성의 엽지 선정에 있어서 수원의 확보는 가장 기본이 되었기 때문에 샘이나 우물의 여부가 제일 먼저 고려 되었다. 그러니 최적의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물 확보가 여의치 않을 경우 밖에 물을 끌어오거나 우물을 파기도 하였고,또 물을 모아 두는 집수정을 축조하였다.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취수구(取水口)를 넘치는 물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배수구(排水口)등의 수문(水門)을 마련하였다.

조선 세종때에 옹성과 해자 적대가 의무화 되었을 정도로 이러한 성곽의 시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입지, 기능에 따라 생략되는 시설도 많았고 별도의 특수한 시설이 부가되기도 하였다.


3. 발전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왕경을 포함하는 도성제가 성립되었으며 한국적인 것으로 정형을 이루게 되었다. 삼국은 모두 강이나 하찬을 낀 평지성과 배후에 산성을 구축한 특별한 전통을 갖추었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26p

북방에서 영토의 확장과 국력의 증강을 꽤하였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축성술이 빌달 하였으며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산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성곽은 대부분 험준산 지세를 이용하여 산꼭대기에서부터 골짜기에 걸쳐 정연하게 성돌을 쌓아올린 형태로 평지성인 왕궁 과 배후신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다가 평양 천도 이후 산성과 펑지성이 걸힘된 새로운 형식의 도성체제를 갖추었다. 이외에 고구려는 교통로의 요총지에 해당하는 협곡에 차단성을 쌓고 높은 산정에 군사적 조망과 봉수대의 기능을 하는 보루(堡壘)등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성곽을 많이 축조하였다.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은 성곽을 축조한 것으로 일려진 백제는 궁성을 포함하여 배후의 산과 시기지를 포괄하는 나성(羅城)을 갖춘 독특한 도성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이러한 나성은 고려와 조선에도 이어졌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27p

신라는 비록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성장하였으니 견고한 성곽축조플 통해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소경(五小京) 정립되면서 낮은 구릉의 읍성과 그 배후의 산성으로 이루어지는 배치가 정형화 된다. 실제로 중원경(中原京)인 충주지역에는 평지의 충주읍성과 배후의 충주산성, 대림산성이 축조되고, 서원경(西原京)에는 청주음성과 배후의 우암산성과 상당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식 산성입보의 방법이 남쪽으로 확대되면서 도읍의 기본적인 구성은 물론 지방 도시까지 같은 계획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완성을 본 축성술은 고려시대기 되면서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산성은 대규모의 대피용으로 이용되었다.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면서 산성은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축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벽의 높이가 낮아지고 성벽의 너비도 좁아지피 성돌도 규칙성이 흐트러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외서는 성곽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조선 초기 국경지대에 성곽 축조가 집중되었고 내륙에는 읍성이 대대적으로 축조, 정비되면서 내륙 산성의 가능이 점차 상실 되어갔다. 또 화약과 화포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성곽은 성벽이 낮아지고 옹성과 치성, 해자를 동반히는 시설물이 증가 하였지만 산성은 규모가 큰 성곽을 사용 하게 됨으로써 삼국시대 이래로 사용 되어온 규모가 작은 산성들은 폐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왜란과 호란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도 성의 방비가 강조되었다. 남한산성 북한산성, 강화도 일대에 대대적인 성곽 정비가 단행되는 등 한양을 중심으로 한 경기 지역의 성곽과 행궁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축조된 화성은 한국 성곽 기술의 총체적 집합제리고 할 수 있다.

도성과 산성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장성(長城)이 축조되었다. 기록상으로 백제가 북방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쌓은 청목령(靑木嶺)~서해에 이르는 장성이 가장 앞선다.이후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고 신라는 패강(浿江) 장성과 동북장성, 관문성(關門城)을 고려 시대에는 암록강 입구부터 동해안의 정평(定平)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둘 장성은 산성들을 연결하는 구조로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세종 때 입록강과 두만강 방면의 행성의 축조로 이어지는 등 역시 후대까지 계속되었다.


4. 특징

전국 곳곳에 남이있는 수많은 우리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 이요, 우리 ‘역사의 비밀칭고’이다, 한국 성곽의
가장 큰 특징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모두를 위한 공동의 공간으로서의 생명의 보루였디는 점이다. 때문에 험준하면서도 안전하고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지형에 따라 축조하여 다 양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선조들이 인식한 고로봉헝 ·산봉형 ·사모봉형 ·마안봉형이 우리 성곽의 가장 큰 특정이다. 산의 봉우리와 능선, 계곡에 성곽을 쌓고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는 각종의 시설을 만들었다. 반대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옹성, 치성, 망루 등 별도의 시설을 따로 축조하지 않음으로써 성곽 축조에 드는 노동력과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었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29p

또 우리의 성곽은 생활공간이 확보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공동 공간이었으므로 유사시 비전투력인 일반 백성들이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방어력을 증가할 수 있었다. 많은 성곽 특히 산성 내에서 확인되는 여러 크기의 냇돌 무더기는 전투기술을 습득하지
뭇한 어린이나 여성들을 포함한 백성들의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힘을 가정 적게 들이고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평지성과 배후성의 배치 상태를 갖추었다. 
펑지성의 경우 대개 앞쪽에 물을 이용해 전면의 저지선을 만들고 배후의 산에 산성을 동반하여 이른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었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 하나의 성곽이 적의 공격 목표가 되면 다른 성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방어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산성과 평지까지를 포함하는 산성과 나성을 결합한 독특한 도성제도를 성립시키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성곽의 또 다른 특징은 돌을 이용한 축조기술의 발달을 들수 있다. 물론 주변에서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화강암이라는 암질의 석재를 다루는 것은 매우 어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협축이었던 내탁이었던 방법에 관계없이 그리고 인공으로 다담은 석재였던 자연 활석이었던 재료에 상관없이 성벽 바깥 면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매우 견고한 성곽을 축조하였다.

사진출처 : 한국성곽 용어사전 :1 한국성곽의 이해(2-1) 30p

성곽의 구조상으로 볼 때도 우리나라의 성곽은 부대시설의 배치에 있어서 산의 능선을 최대로 이용하였으며 매우 독특한 형식의 시설물도 갖추고 있다. 계곡의 증앙부에는 수문과 성문을 설치하여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고, 성문은 평거식, 계단식, 현문 "S"자로 굽어드는 문, 암문 등 다양한 형식의 문을 갖추었다. 또 각종 양식의 옹성과 수구도 불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성곽 시설물의 존재는 그만큼 기술 응용에 있어서 지형과 기능을 최적으로 조화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성곽을 쌓는 이유는 정신적 안정이거니 재산 보호, 또는 생명의 안전 등 아주 현실적인 것이었가. 어찌되었건 간에 이러한 원초적
필요성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자연스럽게 성곽은 우리 주댄의 지형을 고려하여 보다 안전한 곳에 보다 견고하게 쌓아졌다.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성곽에는 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방법과 시설이 선택되어 우리나라 성곽만의 특징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까지 해서 성곽의 축조방법, 시설,

발전,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친절한 선배
친절한 선배 교육·학문

문화재수리기술자가 되는 노하우 전격 대방출!!! 문화재수리기술자 시험소식 + 기출문제 + 개강안내 + 수험자료 + 전통건축용어 + 선배들의 합격 노하우 + 문화재답사이야기 +문화재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