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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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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2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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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가 경영철학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키 겐신, 다케다 신겐,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울지 않는 두견새, 죽여 버리겠다!

울지 않는 두견새, 울도록 만들겠다!

울지 않는 두견새,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오다 노부나가가 준 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떡을 만들고, 먹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먹었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막부 260년을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먹게 된 결정적인 전투는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서기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군을 완벽히 제압한다. 그리고 15년 후인 1615년 드디어 일본을 천하통일하면서 풍신수길이 만든 오사카성을 불질러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는 이후 막부 260년을 열기 위한 국가경영에 들어간다.

그가 국가를 경영한 원칙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꽃과 열매를 한꺼번에 주지 않는다. 였다. 즉 부하들에게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인의 검소한 생활, 계산능력, 경영능력을 배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의 권력을 쥐었지만 보리밥을 먹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세 번째는 불가근 불가원, 원교근공의 원칙을 지키는 것
즉 멀리 있는 사람과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서 형평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 들어가 혼노지에 머물던 밤중에 최측근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었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측근에게 자신의 허점을 보이면 당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머리와 몸을 분리시킨 분단전략

노부나가가 '공포'를 사용한 덤프트럭 같은 관리를 했다면, 히데요시는 현자의 윤리나 도덕에 중점을 두고 부하들을 격려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리고 유지와 관리의 시기에 쇼군이 된 도쿠가와는 분단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쇼군이 된 지 2년 만에 자신의 직위를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슨푸 성에 은거한다. 그러나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슨푸 성에서 다양한 인재들로 참모진을 구성해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것을 에도에 있는 2대 쇼군 히데타다에게 보내 그 정책을 실행토록 했다. 즉 정책을 만드는 머리 부분은 슨푸에 두고, 실행을 하는 몸과 손발은 에도에 둔 것이다. 이러한 이원체제는 2대 쇼군 히데타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꽃은 주어도 열매는 주지 않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을 관리할 때 절대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았다. 꽃은 권력이고 열매는 급여이다. 권력을 가진 다이묘에게는 급여를 적게 주었고, 반대로 급여를 많이 받는 자에게는 요직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쇼군이 되기 전부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부하들에게는 권력을, 정세 변화 때문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 다이묘에게는 급여를 많이 주고 대신 요직에 절대 앉히지 않았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 권력과 경제력을 동시에 주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견제가 되어 부하들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왕도 건설 이전에 낡은 인간의 처리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막부를 출발시키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원칙하에 새 정치체제에 맞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등용했다. 그랬기에 도쿠가와는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는 혼다 마사노부를 기꺼이 등용할 수 있었다. 마사노부의 능력은 과거의 반역행위를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가신이라도 자기 개혁이 가능한 사람만을 등용했다.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의 시기였기 때문에 무사보다는 문신들을 점차 등용했고, 태평성세에 맞지 않는 인물들은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한직으로 물러나게 했다.

세키가하라 싸움은 본처파와 첩파의 격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 일본의 실권을 쥐게 된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도쿠가와는 자신의 최대 무기이자 장기인 여론을 충분히 활용했다. 세키가하라 싸움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 히데요시의 본처인 네네를 지지하는 도쿠가와와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싸움이었다. 도쿠가와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회는 본처보다 첩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상식을 도쿠가와는 전쟁에 이용했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수많은 다이묘가 도쿠가와 편에 서게 되었다. 그 이유는 미쓰나리가 미웠기 때문이 아니라 도쿠가와 쪽으로 돌아선 여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까지 아낀다

도쿠가와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재산은 토지를 제외하고도 엄청났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도쿠가와의 경제 감각과 구두쇠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절약하고 검소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다이묘들 앞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이것을 잘 말해준다. 히데요시를 제압하고 천하를 움켜쥔 뒤 모든 다이묘가 도쿠가와의 성으로 인사를 왔을 때다.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도쿠가와의 옆구리에는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는데 손을 씻다가 그만 그 종이가 떨어지면서 바람에 날아갔다. 그러자 도쿠가와는 맨발인 채로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허공에서 춤을 추는 종이를 붙잡으려 했다. 나무 사이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이묘들은 한결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종이를 붙잡은 도쿠가와는 그것으로 손을 닦더니 다이묘들에게 싱긋 웃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천하를 손에 넣었소." 그 말에 다이묘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후계자 선택이 경영자의 능력을 결정한다

현재의 경영자가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 후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조직이나 기업의 생사가 달라진다. 그만큼 후계자 선택이 중요하며, 게다가 시대의 변화에 맞는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에게는 아들 11명이 있었고 최종 후계자 후보로 오른 인물은 둘째 히데야스와 셋째 히데타다였다. 히데야스는 무예와 지략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반면 히데타다는 평범한 인물로 세키가하라 싸움에서는 사나다에 저지당하여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부족한 대장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쇼군의 독재가 아니라 중역들의 의견을 수렴해 운영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는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히데타다를 2대 쇼군으로 지명했다.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히데타다는 아버지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깨달았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쇼군이 되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가는 나그네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국가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의 평생은 신중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몸을 다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말라. 과유불급이다”

천하를 통일한 쇼군이었지만, 근검절약으로 일관했던 도쿠가와 가문은 신중함과 근검으로 막부

26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꽃을 따기 위해, 열매를 먹기 위해, 아니면 꽃과 열매 모두를 탐하기 위해 ​후보자 주위에 몰려들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후보자들 또한 합종과 연횡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

내가 사랑하는 후배 후보자에게 바란다.

투표는 탄환보다도 더 무섭다!

격탁양청激濁揚淸의 마음으로,

천상운집千祥雲集의 기운이 함께 하기를.......​

 

Seiya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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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 사람이 소중하다! 백만매택 천만매린 이웃이 소중하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民.....無信不立! 정의란?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최대화 하는 것! 억강부약, 격탁양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