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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의 대화 시인, 서도호를 만나다
50대지만 이미 백남준, 이우환을 잇는 대표적 한국 작가로 봉인된 서도호 씨.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집 속의 집>엔 하루 2천 명이 넘는 이가 다녀간다. 앤디 워홀 전시 이후 최고 수준의 인파라고 한다. 대중의 마음까지 단박에 매혹한 그의 작품을 시인 반칠환 씨가 들여다봤다. 서도호 씨와 내밀한 대화도 나눴다. ‘예술가 서도호가 바라보는 집’ ‘시인 반칠환이 생각하는 집’에 대한 이야기. 우린 무임승차하듯 이들의 대화에 귀만 기울이면 된다.


작품 ‘투영’ 앞에 선 서도호 작가(왼쪽)와 반칠환 시인.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집 속의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생각했다. 지붕이 새면 지붕을 고치고, 벽이 답답하면 틀 것이지 집 속에 집을 짓는다? 그런데 생각이 짧았다. ‘집 속의 집’은 아주 보편적이었다. 집은 일종의 헐렁한 옷이 아닌가? ‘우주宇宙’라는 커다란 집 속에, 인간의 건축물 속에, 외투 속에, 육체 속에 영혼이라는 주인이 살고 있지 않은가? 너도나도 집을 껴입고 살고 있는 것이다. 양파와 같은 이것은 겹의 집이다. 전시 <집 속의 집>으로 들어갔다. 색다른 집이었다. 대문부터 지붕, 벽, 창까지 천으로 된 집이었다. 물풀처럼 한들거리는 집이라니. 등을 기대지 못하는 허약한 천으로 이루어진 집은 역설적으로 ‘집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집 속의 집>에는 다시 ‘바퀴 달린 집’ ‘걸어가는 집’ ‘별똥별의 집’이 있었다. ‘기대지 못하는 집’에 이어 ‘움직이는 집’은 두 번째 충격이었다. 레고와 같은 이것은 섞임의 집이다.<집 속의 집> 한쪽 세미나룸에서 시인 반칠환과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마주 앉았다.

(왼쪽) ‘집 속의 집-1/11 프로토타입’, 2009, 스테레오리토그래피ⓒ서도호 Do Ho Suh, 2012.

반칠환 건축이라는 견고한 세계를 가장 유약한 소재로, 가장 리얼한 세계를 가장 환상적으로 표현하셨더군요. 천으로 표현한 문살, 경첩, 욕조, 개수대까지 아주 정교했습니다. 철문은 육중한 듯한데 입김에 나부꼈고, 헝겊 전등에서는 불이 켜질 듯했습니다. 집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서 동화적 판타지를 보았습니다.

서도호 취재 온 수많은 분 가운데 관람 소감은 처음 듣습니다.

반칠환
‘문’이란 작품 앞에서는 오래 멈춰야 했습니다. 유년의 문으로 세계가 열리고 다시 세계가 그 문으로 수렴되더군요. 한 인간의 일생이 문 하나에 담겨 있구나, 우리는 어떤 문을 열고 나와서 어떤 문을 닫고 가는가, 숙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투명한 천에 이미지를 투사한 ‘문’에서는 수천 마리 새가 와글와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다가 어느 순간 문으로 완벽히 깃들인다. 무채색 문이 총천연색으로 바뀌면 고목에 잎이 돋고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담벼락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 난초를 치고, 병풍에서 뛰쳐나온 사슴들이 미처 화제畵題를 떨구지 못한 채 뛰어다닌다. 문 하나에 우주, 별, 창공, 사람의 발자국이 드나든다.

반칠환 천을 소재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도호
집은 물리적 공간이자 비물리적 공간입니다. 비물리적이라는 것은 기억, 추억, 문화, 역사적 맥락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건축가들은 유리를 많이 사용합니다. 벽이 없는 벽을 구축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리는 무겁고 빛만 투과할 뿐, 소리나 공기는 통과시키지 못합니다. 천이라는 소재를 통해 건물의 있음보다 없음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천은 공간 이동에 용이하고, 집은 공간에 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칠환 기억을 통한 ‘없음의 표현’이라는 말을 공감합니다. 제 유년의 집은 물리적으로 훼손됐지만, 기억 속에선 남아 있지요.

서도호 몽골 속담 중에 “절대로 성을 짓지 마라. 반드시 공격당해서 망하리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천으로 된 집 ‘게르’를 만들어 옮겨 다녔지요. 여행을 하면서 살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한곳에 너무 애정을 두거나 물건이 많으면 떠날 때 힘들더군요. 집착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집’입니다. ‘고향’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칠환 정주에서 집착을 보고, 유목에서 무소유를 보았군요. 저는 정주에서 자족을 보고 유목에서 탐욕을 봅니다. 저는 여행이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라 생각합니다. 남의 담을 넘보고 텃밭을 짓밟게 마련이지요. 제국주의가 그랬고, 오늘날 글로벌 자본 또한 유목이지요. 기웃거리며 끊임없이 앗아가지요. 유목을 통해 언어는 획일화되고, 의식주가 균일해집니다. 세계는 넓게 경험되나 좁아지고, 유목이 가져다주는 메뉴는 결국 ‘다양한 빈곤’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우리는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에 있는 듯’ 우쭐대지만 실은 ‘이곳에도 없고 저곳에도 없는’지도 모릅니다.

서도호 저는 기억을 영속화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집’이 저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 집을 자로 꼼꼼히 재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집중적으로 그 공간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었습니다. 음악도 한참 들으면 지루해지듯이, 그렇게 되면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 음악이 나오면 다시 따라 부르듯이 언제든지 기억 속에서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칠환 ‘별똥별 1/5’은 태평양을 날아온 유년의 한옥이 거대한 양옥의 벽에 박힌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사진으로 보는 순간 저는 ‘충돌’이 아니라 ‘짝짓기’를 떠올렸습니다.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와 앉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충격과 상처를 입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고, 둘은 서로에게 스며들 것입니다. 집 속의 집이 될 겁니다. 남방의 마루와 북방의 온돌이 만나 태어난 한옥처럼 말이지요.

서도호 짝짓기라 표현한 것에 동감합니다. 저 또한 물리적 충돌보다 생태적 만남을 추구했습니다.

반칠환 한 가지 우려는 ‘집과 집’이 만나서 ‘집 속의 집’이 되고, ‘집 속의 집’들이 만나면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 될 것입니다. 이종교배는 건강한 2세를 낳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복잡한 진화는 단순한 적응보다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너무 많은 개성의 차용은 개성의 상실 아닐까요. 세계는 지나친 접촉과 스며듦으로 너무 균질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합니다.

서도호 이종교배의 어두운 시나리오도 작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이 침입하는 것일 수도 있고, 숙주와 기생 관계를 포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숙주가 강하면 기생하는 것이 죽을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1 ‘서울 집/서울 집’, 2012, 실크・금속 틀, 1457×717×391cm. 이하 모두 ⓒ서도호 Do Ho Suh.
2 ‘베를린 집:3개의 복도’, 2011, 폴리에스터 천・금속 틀.


3
‘별똥별 1/5’, 2008-2011, 혼합 매체, 762×368.3×332.7cm.
4 서도호 작가.


반칠환 ‘집’은 태평양을 건너도 시차를 견디겠지만, ‘몸’은 시차와 여독을 견딜지 의문입니다. 탈것의 발달은 공간을 넓혀주지만 거꾸로 공간을 축소시키기도 하지요. 오솔길을 걸으면 이슬이 차이지만 지하철은 백 리를 가도 바짓가랑이가 보송보송하지요. 속도만 남고 풍경이 사라지는 걸 경계합니다. 문명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논스톱 직항로를 개설할지 모릅니다.

서도호
시차와 여독을 몸이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저도 걱정입니다. 사실 장거리 비행기를 타면 힘듭니다. 인류는 지구 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요. 비행기를 타면 방사능에 많이 노출된다고 합니다. 저는 글로벌 유목민이라 명이 단축 될지도 모릅니다. 역마살이 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여행 패턴이 바뀌었습니다. ‘짧고 가깝게’ 하려고 합니다. 떠도는 게 피곤한 삶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몸이 정주할지는 모르지만 마음 자체는 정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반칠환 어떤 집이 바람직한 집일까요? 저는 인류가 ‘불멸의 집’이 아니라 ‘소멸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허물 때 쓰레기가 나오는 집이 아니라 ‘반죽’이 나오는 집.

서도호 저 또한 영속적인 건축을 꿈꾸지 않습니다. 재산 가치로서의 부동산으로부터도 벗어나 있습니다. 천으로 된 집은 영속이라기보다 그것을 거부하는 개념입니다. 천은 언제나 사라질 수 있는 허약한 것이지요. 미술품을 금전적 가치로 생각하면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작업을 해왔습니다. 언제라도 찢어지고, 색 바래고, 없어질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북쪽 벽’, 2005, 폴리에스터 천・금속 틀, 505×124×827cm.

‘뉴욕 웨스트 22번가 348번지 A 아파트, 복도, 계단’, 2012, 폴리에스터 천・금속 틀, 690× 430×245cm.


반칠환 서로의 눈을 가린 사람들로 이루어진 탑 ‘카르마Karma’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의 업이 개인으로 해결되지 않는 ‘업의 연쇄’가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 눈은 누가 가리고 있으며, 나는 누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걸까요? 불교에 심취하신 듯합니다.

서도호 불교 공부는 유학 간 후에 했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불교를 지식 차원에서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윤회 사상’은 서양적 생각과 많이 대비되더군요. 불교는 ‘연기설’이 근간입니다. 작품 제목을 ‘카르마’로 할 때 부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안 나오더군요. 그것은 불교적 사유를 시각적 언어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반칠환 사람의 눈은 왜 가렸나요?

서도호 맨 밑의 사람은 자기 눈이 가렸는지 모릅니다. 개인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눈이 안 보이는 조건에 의해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은 은유적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합니다. 유전적인 것을 포함해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칠환 ‘Net work’ 역시 ‘카르마’의 연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엮인 금속 인형 그물이 물속에서 뒤채는 걸 보았습니다. 손에 손잡고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 없는 모습에서 ‘人드라망’의 그물을 보았습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노랫말은 매우 희망적인데, 이 사람들이 손잡고 있는 것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입니다. 인간의 숙명처럼 보입니다.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습니까?

서도호 스튜디오나 작업 공간에서는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일을 할 수 없는 시간, 예를 들면 터미널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이미지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머리를 짜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물화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작품은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고 믿는 서도호 작가는 언어보다 시각적 사유에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두루마리처럼 전개된다면 시각은 액자처럼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언어는 느리고 시각은 빠르다. 시각적 사유는 시적이고 언어적 사유는 산문적이다. 전자는 제시하고, 후자는 진술하기 때문이다. 미술을 글로 읽는 것은 어리석다. 직접 작품을 만나지 않으면 본문없는 주석에 불과하다. 서도호의 <집 속의 집>은 이미지로 된 웅변이다. 가서 귀 기울여보라. 세계관은 세계가 다 들어가는 ‘관棺’인가? 당신의 귀에 고정관념의 완고한 성채가 무너지고 새집의 주 추가 놓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집 속의 집>전은 6월 3일까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다(월요일 휴관). 그를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 ‘서울 집/서울 집’, 12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 초대된 ‘블루프린트’ 등 ‘집’ 시리즈를 비롯해 신작도 같이 전시한다. 관람료 일반 7천 원. 문의 02-2014-6900

서도호 씨는 서울대 동양화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후 미국으로 넘어가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회화, 예일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뉴욕 휘트니 미술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도쿄 모리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반칠환 씨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시선집 <누나야>,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을 펴냈다. 10년 가까이 <행복이가득한집>에서 그만의 문기文氣가 담긴 인물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제공 서도호

글 반칠환(시인) | 진행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