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1. 궁궐 안의 일상 옷차림

신하, 문무백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어 직책을 받은 신하, 즉 문무백관은 맡은 바에 따라 일상적인 시무복(상복)의 모습인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을 입은 후 그 위에 각띠(角帶)를 두르고 발목이 긴 장화 형태의 신발(靴)을 신고 입궐하여 업무를 보았다. 사모는 모자 양쪽에서 수평의 방향으로 뻗어 있는 뿔이 특징으로 원래는 검은 헝겊을 머리에 감싼 복두(幞頭)에서 발전하여 시기에 따라 재료와 형태가 변화하였다. 복두에서 단단한 재질의 사모로 발전한 후에도 초기에는 부드러운 양 뿔(兩脚)이 밑으로 처진 형태였으나 차차 빳빳해져 조선 중기 명종대 이후로는 양옆으로 반듯하게 펴진 단단한 경각(硬角)의 형태가 되었다. 머리에 쓰는 부분인 모체(帽體)의 높낮이 및 양 뿔의 폭과 길이도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모체가 높고 양 뿔의 폭이 넓고 평직이었으며, 말기에는 모체가 다시 낮아지면서 양 뿔의 폭은 여전히 넓으나 길이는 짧아지고 앞으로 굽었다.

<김이소 초상>   
영·정조대의 문관인 김이소(金履素)가 문관 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양뿔이 넓고 짧은 조선 후기 형태의 사모에 운문의 현록색 단령을 입었다. 쌍학흉배와 서대(犀帶)를 통해 품계가 높은 문관임을 알 수 있다.

단령은 왕의 곤룡포와 같은 형태이나 관직의 품계에 따라 색상과 옷감을 달리하였으며, 시기에 따라 색상과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1품에서 정3품은 홍포(紅袍), 종3품에서 6품까지는 청포(靑袍), 7품에서 9품까지는 녹포(綠袍)를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편찬한 『속대전(續大典)』에는 당상관인 정3품 이상은 사(紗)·단(緞)으로, 당하관인 종3품 이하는 사(紗)·견(裐)의 현록색(玄綠色) 포로 하도록 하였다. 이후 구한말에는 갑신 의제 개혁(1884) 때에 흑단령을 입었고, 갑오경장(1894)으로 관복이 간소화되어 주의(周衣)로 바뀌었다.

<노신(老臣)의 출근 모습>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평생도팔곡병(平生圖八曲屛)의 제7면 부분이다. 분홍 단령에 모관을 쓴 신하가 사인교를 타고 입궐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상복 제도에 관해 조선시대 내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상복의 옷(袍)이 관복의 또 다른 유형인 시복(時服)과 같은 단령이었기에 개념과 용도에 있어서 혼동이 있었다. 이러한 혼동으로 말미암아 일관성이 흐트러지게 되어 제도의 시행과 마련에 논란이 많았다. 조선시대 백관의 단령 제도는 15세기 말까지 시복과 상복의 뚜렷한 명칭 구별 없이 혼용된 채 색으로만 구별하여 의례용일 때는 흑색, 집무용일 때는 여러 색의 단령을 임의로 입었다. 이후 16세기에 시복은 의례용의 의미로 흑색, 상복은 집무복의 의미로 홍색의 단령을 입다가 17세기부터 다시 변하여 의례용의 의미로는 흑색 상복, 집무복의 의미로는 홍색 시복을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상복과 시복은 흑단령, 홍단령으로 각기 혼란이 있어 왔는데 대체로 의례복 용도의 단령 색상은 흑색, 집무복 용도의 단령은 홍색을 입었다. 이러한 내용은 『미암일기』에 나타난 관리의 하루 생활 속에서 흑단령과 홍단령을 갈아입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하루를 예를 들면 상참(常參, 신하가 편전에서 왕에게 국정을 아뢰는 일)이 있는 날, 아침 일찍 시복인 흑단령 차림으로 입궐한다.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궐문이 열릴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다. 의례를 마친 후에는 집무에 임하기 위해 홍단령으로 갈아입었다. 이때 벗은 옷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이지 않으나 관리들에게는 항상 하인이나 시종들이 따라다녔는데 그들 중 누군가 관복함을 담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흑단령을 담을 수 있는 관복함이 있어서 보관하였다가 퇴궐할 때 집으로 가지고 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평생도팔곡병(平生圖八曲屛) 중 제7면에는 출근하는 노신(老臣)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분홍 단령 차림을 하고 사모에 모관(毛冠)을 쓰고 입궐하는 중이다. 그림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그를 호종(護從)하는 상당수의 시종들 중 한 사람이 관 복함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흑단령이 아닌 홍단령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짐작컨대 이날은 아침 행사가 없는 듯싶다. 흑단령의 색상은 조선 전기에는 아청색, 후기에는 현록색으로 나타난다.

<쌍학흉배>   
조선시대 문관의 상복에 가식한 쌍학흉배이다.
<쌍호흉배>   
조선시대 무관의 상복에 가식한 쌍호흉배이다.

백관의 상복에도 왕과 왕세자와 같이 포에 흉배를 부착하였으며 흉배의 무늬로 품계를 구별하였다. 왕과 왕세자는 둥근 보인 데 반해 백관은 네모난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부착하였다. 흉배 제도는 1454년(단종 2)에 최초로 제정되었다. 대군은 기린(麒麟), 왕자는 백택(白澤), 문관(文官) 1품은 공작(孔雀), 문관 2품은 운학(雲鶴), 대사헌은 해태(獬豸), 당상 3품은 백한(白鷳), 무관(武官) 1·2품은 호표(虎豹), 무관 당상 3품은 웅비(雄飛)로 하였다.141) 이후 많은 혼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로 대개 문관 당상관은 학 두 마리가 쌍을 이루고 있는 쌍학(雙鶴), 당하관은 학 한 마리인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호랑이 두 마리가 쌍을 이루고 있는 쌍호(雙虎), 당하관은 호랑이 한 마리인 단호(單虎)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관리의 지위에 따라 무늬를 달리했는데 일반적으로 문관은 새, 무관은 짐승의 무늬를 사용하였다.

관리의 상징이었던 단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세종은 서민들의 단령 착용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혼례 때만은 착용을 허용하여 관직이 없는 자 들도 혼례에는 단령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모 대신 갓을 쓰게 하고 지위를 나타내는 품대(角帶) 대신 실띠의 일종인 ‘조아(絛兒)’를 띄게 하였다. 그러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후대에는 관원과 같은 사모에 품대까지 착용하고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단령은 개인적인 집안의 제사(私祭)에도 사모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상례에서도 수의로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전통 결혼식의 신랑 예복으로, 결혼 후 신랑의 폐백용 의복으로 신부의 원삼(圓衫)이나 활옷과 함께 입고 있다.

[필자] 임재영
141)『단종실록』 권12, 단종 2년 12월 무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