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과 탐험한 런던 골목, 예술이 되었죠

'백남준을 이을 작가'란 상찬(賞讚)에 서도호(55)가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과장된 부분이 많아요. 길거리 다니면 아무도 못 알아봅니다. 하하!" 백남준이 63세에 받은 호암상 예술상을 55세에 수상하러 런던에서 날아온 길. 20년 산 뉴욕에서 런던으로 이주해 영국인 아내, 두 딸 아미·오미와 살고 있는 그는 "아이들 기저귀 갈아주느라 작품 활동이 뜸했다"며 활짝 웃었다.

서도호는 천으로 '집'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아티스트다. 옥색, 귤색, 보라색 천들을 바느질로 꿰매 날아갈 듯 지어 올렸다가 언제든 접어서 이동할 수 있는 집을 세계 곳곳 미술관에 선보였다. 국내엔 2012년 리움미술관 전시 '집 속의 집'을 통해 대중에 각인됐다. 앤디 워홀 전시보다 많은 10만 관객이 줄지어 관람했다. 200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2012년 베네치아 건축비엔날레까지 섭렵하며 해외에선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다. 세계 평단은 "탈영토 시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경계인 혹은 유목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런던으로 간 서도호는 지난봄 아주 오랜만에 '새집'을 지어 화제를 모았다. 2월부터 두 달 가까이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연 'Passage/S' 전시다. 자신이 살았던 서울·뉴욕·베를린·런던 집을 본뜬 9개 공간과 이들을 잇는 '통로'를 강조한 작업이다. 두 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딸들을 유모차에 태워 2년 반 동네를 탐험하면서 촬영한 영상물을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했지요. 예기치 않게 뉴욕에서 런던으로 옮겨가면서 또 50대에 두 딸의 아버지가 되면서 '인생이란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통로(passage)'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시는 성황을 이뤘다. 구사마 야요이 전시 이후 빅토리아 미로에 관람객이 전시장 밖까지 줄 선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일간지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스는 "올해 꼭 봐야 할 전시"로 꼽았다.

지난해부터는 '탁본' 작업에 열심이다. 20년을 산 뉴욕 웨스트 22번가의 아파트 내부를 흰 종이로 도배한 뒤 색연필과 파스텔로 구석구석 문지르는 작업을 6개월간 지속했다. "천 작업이 아무리 정교해도 공간에 대한 정보를 100퍼센트 전하진 못한다"는 것이 'Rubbig, Loving' 프로젝트의 시작. '아메리칸 파더'라고 불렀던 집주인과의 각별한 인연도 동기가 됐다. "생면부지 외국 청년에게 집을 빌려주고 애정도 쏟아주신 분이죠. 2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더군요. 벽에 뚫린 구멍을 발견했을 땐 그때 내가 왜 여기에 구멍을 뚫었는지,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까지도 거짓말처럼 기억났으니까요."

마루부터 천장까지 무릎 꿇고 기어올라가며 해야 했던 탁본은 강도 높은 노동이자 '수행'이었다. "문득 10년 전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전생에 티베트 스님이었다는! 히말라야산 오르며 그 여정에 있는 돌을 하나하나 닦는 것으로 수행했다네요 제가. 하하!" 뉴욕 아파트를 탁본한 수천 장의 종이는 다시 실물 크기로 세워 전시할 계획이다. "천으로 지은 뉴욕 집과 종이로 지은 뉴욕 집을 쌍둥이처럼 세워 보려고요."

집 작업 외에도 수천 개 인간 모형(미니어처)이 유리 바닥을 떠받치는 형상으로 권위주의를 풍자한 'Floor', 얼굴 없는 60개 마네킹에 교복을 입혀 획일화된 제도 교육을 질타한 '교복' 등 서도호 작품은 난해하지 않고 명쾌한 현대 미술이라 사랑받는다. 그는 "동양화가 아버지(서세옥)에, 대학(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덕"이라며 웃었다. "동양화, 특히 문인화는 덧칠하는 걸 금기로 여기니까요. 간결하고 절제된 화풍 속에서 자란 것이 도움을 준 듯합니다."

서도호는 "딸과 함께 세상을 구경하며 느낀 것, 20년 동안 살 곳을 내어준 집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예술"이라고 했다.